240419
대학 시절 만난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관용)가 있는 사회인가, 없는 사회인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았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법을 중요시했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운전사를 택시운전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이 말은 택시운전사인 내가 택시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또 어느 날 동료와 다툰 뒤 이런 생각을 했다고 썼다.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통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책의 초판은 1995년에 나왔고, 우리는 그때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똘레랑스’와는 거리가 먼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설득보다는 강요와 혐오의 힘이 훨씬 세진 게 아닌지...
어제 세상을 떠나신 홍세화 선생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그의 글과 그의 정신이 오래 그리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