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이라는 경전-14-
거리 두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한다. 거리 두기는 세 가지를 포함한다. 첫 번째는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현판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가 말하는 대로, 사멸하는 존재가 불사의 존재에 대한 간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들 사이의 간격을 지키는 것. 곧 부끄러움과 존경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개별적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 거리 두기가 욕망과 열정이 휩싸여 방종으로 치닫지 않게 해준다. -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역, 『지중해 철학; Treffpunkt Platon』, 효형출판, 2007
그리스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를 ‘소프로시네(sophrosyne, 절제)’라고 부릅니다. 아폴론 상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소프로시네의 형상화입니다. 즉 적도(適度; metron)를 지키고 자제하는 삶의 형상화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수(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그리스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적도를 수적 비례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에게도 절제 있게 적도를 따른다는 것은 경계의 지킴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마주치는 모든 것이 감추어지거나 닫혀있지 않다는 데 감사하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관계가 넓은 의미에서의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빛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는 대상에 마음의 눈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과 함께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리스적으로 표현해서 적도(適度, metron)를 넘지 않는 일이 중요한데,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고정된 수적 비례 관계를 통해 적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한도와 질서는 좋은 것이다. 그리스 인들에게, 넓게는 세계와 좁게는 생물의 안녕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바른 ‘혼합(krasis)’이다. 세계 전체를 나타내는 그리스 개념 ‘코스모스(kosmos)’는 원래 ’장식, 화려하게 치장된 질서, 조화로운 배열‘ 정도를 의미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우주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이유가 어쩌면 수적 비례 관계가 잘 짜였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랬던 것이 세계의 다양한 현상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코스모스’는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개념에 붙을 수 있는 이름이 최초로 생겨난 것이다.
화장이라는 뜻의 ‘cosmetic'이란 단어가 사실은 ’숙련된 장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kasmetikos'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는 고급 매춘부만이 화장으로 얼굴을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이들 여자는 방향제가 첨가된 검은 먹을 적신 솔로 눈꺼풀에 화장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하나인 『크리티아스』의 첫 장을 보면 등장인물인 티마이오스가 크리티아스에게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올바른 벌이란 틀린 소리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소리를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피타고라스 학파의 발견 이래로 그리스 사람들은 우주(kosmos)의 혼합(krasis)의 수적 비례 관계를 통해서 잘 맞아떨어지는 상태를 ‘하르모니아(harmonia)'라고 불렀다. 이 말은 원래 음악 용어인 ’화성(和聲)‘에 사용되던 것이 폭넓게 적용되어 자연의 전 영역에 걸쳐 사용되었다. 틀린 소리를 내는 대상이 바른 소리를 내도록 하는 조화를 찾아주는 일이 훈계요 치료라고 본 것이다.
건강은 대립자들-건냉과 온습-의 비율에 의한 혼합(krasis)에 달려 있다. 따라서 희랍 철학에 있어서 대립되는 성질들간의 바른 양적 관계의 유지는 희랍의학의 주출돌로써, 희랍 의학은 크로톤의 알크메온의 저술과 더불어 시작했다.
근대 수학이 자연의 양적 측정과 계산을 용이하게 했던 대수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접어들 수 있었다면, 근대 의학은 인체의 각 기관들에 대한 인식을 급진적으로 증대시킨 의사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을 통해 확고한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에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았던 해부학이 의학 발전의 기폭제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근대적 반동의 여파 때문이었다. 전통 형이상학은 무규정적 물체가 특정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규정하고 조직화하는 형상적 원리를 자연의 목적으로 수용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관계를 보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론은 기계론에 의해, 인간이 영혼의 활동 속에서 자기 목적을 실현한다는 관념은 기계 속의 정령이라는 지극히 유물론적 관념에 의해 대체되었다. 베살리우스 역시 근대 자연과학의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의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인체 해부학을 통해 정초한 근대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 의학의 창시자”였고, 사람들은 그가 나타남으로써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의학의 방향은 베살리우스 이후 자연스럽게 인체의 다양한 기관들이 지닌 육체적 기능과 기계적 기제를 인식하는데, 그리고 실험과 관찰에 의거해 진단과 치료의 정확성을 증대시켜 나가는데 집중되었다. 또한 인체에 관한 새로운 생물학적, 화학적 분석 방법의 발견은 의학의 세분화와 전문화를 가능하게 했다. 의학은 예전에 비해 분명 진단 및 치료 능력에서 향상되었고,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렇지만 인체의 기계적 활동에 대한 믿음은 의학으로부터 인체를 살아 있는 하나의 전체로, 특히 자연 전체와의 지속적인 신진대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유기체로 볼 수 있는 포괄적 관점을 배제시켰다. 오늘날 서양 의학자들이 해부학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인체의 유기적 연관성을 잘 보여주고 치료 효과 역시 뛰어난 동양의 침술에 열광하는 것도 그들이 이미 인체를 하나의 전체로서 자연 전체로부터 관망할 수 있는 방법적 관점 자체를 상실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인체 해부학의 길은 연 근대 의학은 독립 과학으로서 인간의 질병을 인체를 이루는-보다 단순한-기관들을 통해 설명하고 치료할 수 있게 하였지만, 인간을 그의 성격이나 사회적, 지리적, 물리적 환경과의 연관 속에 총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신체 활동이 보편적 기능 조건들을 다루는 상위 과학들에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엄밀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고대 의학의 가치를 재론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고대 의학은 세부적인 측면에서 근대 의학이 성취한 정확성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개별 현상들을 설명하고 타당성을 갖기 위해 요구되는 모든 가능한 조건들과 원인들을 고려했다는 점에서는 근대 의학이 추구한 엄밀성과 전혀 다른 차원의 과학적 엄밀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을 추구했던 고대 의학과 고유한 과학 이념과 방법은 최초의 과학적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상인,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이제이북스, 2006
데스몬드 모리스, 이경식•서지원 역,『벌거벗은 여자;The Naked Woman』, Human & Books 간, 2004,
플라톤, 이정호 역『크리티아스』, 이제이북스, 2007
W․C․K 거드리, 박종현 역, 『희랍철학입문』, 종로서적, 1994
이상인,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이제이북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