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 Apr 07. 2021

악습을 버리는 순간들

오래된 안 좋은 습관을 버리는 방법

악습을 버리는 것은 그 습관을 버리겠다고 입으로 내뱉고 그걸 실패했다고 푸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을 때 내가 영영 그 습관을 버리게 될 것이란 걸 직감하고 정말 그렇게 영원히 그 악습과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 직감을 느낄 때는 마치 목에 담이 걸려 한동안 풀리지 않던 게 어느 순간 피가 탁 통해서 머리 전체에 막힌 혈이 뚫려 머리 구석구석이 주뼛쭈뼛 서고 마치 머릿속이 완전히 리셋되는 상쾌하고 말끔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몸도 머리도 가볍고 어떤 확신에 찬 언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그냥 조용히 절대 뒤를 돌아보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아무런 미련도 별다른 고통과 어려움도 느껴지질 않는다. 그 악습을 버리기 위해 뭔가 나를 위해 보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악습을 견뎌내기 위해 뭔가를 대체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홀연히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일상생활을 하다가 불현듯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마는, 그런 단순한 것이다.


내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다. MBTI 성격상 나는 청소를 잘 안 하고,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지만 그 계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사실 그런 경향이 매우 뚜렷했다. 청소를 왜 하는지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리에 물건을 놓는 것 까지는 좋은데, 빨래를 개는 것, 헝클어진 물건들을 제대로 놓는 것이 말 그대로 귀찮고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저 보기 좋기 때문에 내 시간을 일일이 쏟아가며 그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청소란 두세 달에 한번 모든 걸 뒤엎고 한 번에 말끔히 정돈하는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원상태가 되기를 반복하는 그런 석 달에 한번 있을 월례행사 같은 것이었다. 보통 그 청소란 것도 해야겠다는 작심을 미리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불현듯 눈을 뜨자마자 '아 청소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몸을 움직였다. 사실 집 자체는 늘 완벽하게 정리정돈, 청소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내 방만이 마치 말끔하게 정돈된 일본식 정원 옆에 한 십 년 정도는 발을 들이지 않은 집처럼 이질감이 있었어도, 사실 내 방이 유난히 더럽다는 것에 어떤 불편함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 더러운 공간에 있을 때 굉장히 불쾌해하고 깨끗한 공간에 있을 때 굉장히 기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이 있은지 얼마 안돼서 나는 어느 날 문득 아침에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봤다. '아, 난 앞으로 정리정돈을 하게 되겠네.' 그 후로, 나는 늘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을 한다. 내가 언제 그렇지 않았냐는 듯.


어떤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게 아니라, 왜 그게 필요한지를 어느 순간 완벽히 깨닫는 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뭔가가 되어야지!라는 결심, 뭔가를 하지 말아야지 라는 습관적인 다짐이나 결심은 스스로에게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왜냐면 그 결심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심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실망스럽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차라리 내가 만약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그 순간 자체를 즐기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누군가 당신에게 담배를 피우면 몸에 나쁜 온갖 의학적 이유를 대가며 당신을 설득하려 하더라도,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지만 참기 힘든 어떤 습관일 뿐일 테니까. 차라리 담배를 못 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그냥 끊을 생각 자체를 애초에 하질 마는 편을 추천한다. 내가 이 행동을 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그 행동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해도 좋다, 설령 그게 악습이라 할지라도. 그게 오히려 어느 순간 당신의 삶의 한 부분을 완전히 뒤집을 때 더 이득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스스로를 '진골빼미'라고 불렀다(사전에 있거나 누군가 사용하는 단어는 아닌데, 보통 말하는 올빼미족처럼 밤을 선호하는 것을 너머 낮밤을 뒤집어 살아갔기 때문에, 진골+올빼미를 합쳐서 스스로 진골빼미라 명명했다). 스튜디오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의 낮밤이 바뀌어있거나, 수면습관이 완전히 깨져있는 순간이 허다했다. 개인적으로 잠을 자는 것보단 노는 편을 더 선호했기 때문에 피곤을 달고 살면서도,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다섯 시 정도까지의 고요하고 오직 나만 깨어있는 그 밤의 무드를 너무나 사랑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는 그런 성향이 더 빛을 발했다. 나는 아침 일곱 시 반쯤 잠에 들어 오후 두시반쯤 일어났다. 수면시간으로 보면 정확히 8시간이었다. 밤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는 밤 산책도 즐겼고, 내 생활패턴은 그저 낮과 밤이 바뀌어 있을 뿐 굉장히 체계적이었다고 생각했다(물론, 당시엔 그렇게 믿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아침형 인간일 필요도 없으며,  밤늦게 잠을 자지 않는 나를 나무라는 듯한 아침형 인간들(내 가족)을 그저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스스로 무척 부지런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라고 분류했다. 사람은 모두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것 중 무엇이 유난히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는 건 그저 몰지각한 편견일 뿐이라 여겼다. (난 절대로 올빼미족의 삶의 형태를 부정하지 않는다. 패턴만 다를 뿐 그들의 삶도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다. 또한 언제든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돌아갈 준비도 되어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자르듯 새벽 네시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으로 돌연 바뀌었다. 


늘 그랬듯, 같은 레퍼토리로 나는 어느 날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 후, 내가 앞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을 택하게 될 거라 직감했다. 진골빼미로 살아가며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진심으로 밤늦은 시간,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 시간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 새벽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똑같이 새벽시간을 보내더라도 그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아침형 인간과 올빼미형 인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후 두시반에서 세시쯤에 일어난 올빼미형 인간인 내가 새벽시간을 맞이할 땐 이미 하루를 진득하게 보내고 몸과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느긋해져 있었다. 그런 무드 자체를 사랑하긴 했지만, 이 새벽시간을 좀 더 집중적으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내 몸만 한 푹신푹신한 쿠션에 기대어 글을 쓸 때의 기분이 좋긴 했지만, 이미 하루를 보내면서 내 머리에 생각들이 많이 쌓이고 머리가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상태에서 뭔가를 완전히 집중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고, 그렇게 푹 늘어진 꼴이 어느 순간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만약에 이 새벽시간을 내가 좀 더 완벽하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좋아하는 새벽 시간인 한시부터 일곱 시를 잘 보낼 수 있게 차라리 수면 시간을 오후 네시에서 새벽 한 시 정도로 조정하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지만, 사람들이 한참 집에 돌아와 생활하는 시간에 불 켜는 작은 소리나 복도의 불이 들어오는 것에도 예민한 내가 편히 잠들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내가 새벽시간 일찍 잠에서 깨어 활동을 하는 편이 이 시간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니, 일단 한번 새벽 일찍 일어나는 방법을 택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밤 열두 시에서 한시쯤에 잠에 들어 새벽 세시반에서 네시 사이에 눈을 뜬다. 처음엔 다섯 시나 여섯 시에 기상시간을 맞췄지만, 새벽시간이 생각보다 짧아 자꾸 다섯 시, 네시, 세시반으로 기상시간이 빨라졌다. 사실 수면 시간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안다. 그동안 수면시간은 여덟 시간이었기 때문에 겨우 세 시간 수면은 내 몸이 큰 무리다. 지금은 내가 최대한 일찍 잠에 들길 바라지만, 잠에 드는 것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차츰차츰 잠드는 시간을 빠르게 바꾸는 중이다. 대신, 새벽 네시부터 모닝 루틴과 내 할 일을 한 후, 잠시 낮잠으로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렇게 수면을 나누고 나니 하루에 리셋되는 시간이 둘로 나뉘어 외려 회복 구간이 생겨 내 몸에 더 맞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외에 여러 말 못 할 많은 악습들을 이런 방식으로 정리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런 자신을 떠올려보고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더 나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계속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때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최대한 단순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삶을 평안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간 나는 삶을 살아오면서 내 문제점에 대해 회의하는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이 많은 스스로와의 대화에서 가장 필요한 건, 끊임없는 결심과 깊이 고심하는 일이 아니다. 확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어떤 의문도 스스로를 설득하거나 타협하는 모든 생각을 멈춰야 한다. 생각이 원체 많은 나로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충분히 논리적인 생각에 다다르더라도 동시에 그 결심과 계획의 문제점을 따지고 들고 그걸 계속 반박하기에 이른다. 결국 많이 생각해봐야 좋을 게 없다. 그저 명백히 뭔가를 느끼고 깨닫는 기분만이 내가 갖고 있는 어떤 행동이나 생활방식을 모두 초기화하는 '리셋 버튼'이다.  


바로 '어떤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순간에서 모든 생각을 멈추면 그다음에 나올 행동은 단 하나다. 그 행동을 그저 하는 거다. 계획을 세우고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본인이 세워 둔 계획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웠지만 다른 우선순위가 있는데. 내가 계획을 이렇게 세웠지만 다른걸 먼저 하면 좋을 텐데, 이건 내일로 미루자. 이런 식으로 계획에 대해 여러 생각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계획대로 하루를 조용히 보낸 후에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나는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않는 성향을 버렸다. 타고난 성향은 분명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성향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우리 자신의 자아는 타고남, 환경, 후천적인 어떤 장애물이나 요소보다 더 강하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렇게 지루한 자신의 허물에서 벗어날 필연적인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믿는다. 어떤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박하고 강요하려 들지 말고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 살다 보면, 당신이 정말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 악습의 고리는 순탄히 끊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