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
맹렬이를 키울 땐 산책 중인 개들이 응가만 해도 귀엽더니, 집에 고양이가 온 후부터는 길 위의 모두가 신경 쓰인다. 임신한 고양이는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싶고, 바닥에 붙어 빠르게 뛰어가는 작은 고양이는 저 몸으로 험한 길에서 생활하기 얼마나 힘들까 싶다. 큰 고양이들은 걱정할 순위에서 좀 밀린다. 큰 아이들이란 대개 수컷이고 그래서 가끔 새로 난 상처를 달고 나타나지만, 뱃속에 꼬물이들을 품고 있는 임신묘나 태어난 지 1년도 안된 꼬마들에 비할바는 아니다. 뭐... 너 정도의 덩치면 그래도 어떻게든 살겠지 뭐.
그중에서도 상당히 걱정이 안 되는, 길고양이 치고는 꽤 큰 고양이가 있었다. 회사 앞 밥자리에 오는 애들이 반달이, 얼룩이, 젖소, 흰둥이, 치즈 등등 식별용 이름을 하나씩 얻어갈 때 그 아이의 이름은 없었다. 누구보다도 컸지만 누구도 기억을 못 하던 그 고양이는 주로 이렇게 불렸다. 아, 그 큰 애.
길고양이 중에서도 무리를 이뤄 자주 함께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데, 큰 애의 포지션은 좀 애매했다. 둘셋씩 같이 다니는 애들과 아무 탈없이 무난하게 지내면서도, 절대 그 무리의 일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덩치가 큰 고양이라 다른 고양이들이 보기에도 걱정 안 되는 친구인 걸까? 큰 애는 누구와도 척지지 않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 언제나 혼자서 밥을 먹으러 왔다.
고양이가 꽤 많이 돌아다니고, 제법 밥자리를 찾기 쉬운 회사 근처에도 가끔은 다툼이 있었다. 특히 처음 밥을 먹으러 오는 애들이 박힌 돌들의 텃세에 사료 냄새만 맡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일들이. 도망치는 애들은 작고 연약해 마음이 쓰였다.
큰 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큰 애는 다른 고양이들에게 하악질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풍에 가까웠다. 작고 어린, 혹은 임신한 친구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한 발 떨어져 줄을 선 듯 가만히 기다렸다. 그 때문인지 이 구역에서 가장 덩치가 큰 그 아이가 무서워 도망치는 고양이들은 없었다. 임신해 날카로워진 아이들도 큰 애 앞에선 한참 동안 밥을 먹고 갔다. 다른 애들 밥 먹을 때 배경에 보이는 커다란 노란 줄무늬. 큰 애는 아주 오래 다른 고양이들 사진에 배경이 되었다.
선미(善美).
그 마음이 착하고 예뻐 선미라는 이름을 붙였다. 커다란 덩치와 이름의 괴리 때문에 며칠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키득키득 웃었다. 선미가 (중성화된) 남자라는 건 이후에 안 사실이다.
이름을 짓는 건 다정하지만 위험한 일이다. 특히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면 감정 쓰는 날이 많아진다. 처음엔 간식을 샀고, 그 후엔 캔을 샀다. 캣닢도 길렀다. 그러자 주말에 텅 빈 사료 그릇을 핥을 선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갔다. 내 마음이 편해질 줄 알고.
간식을, 캔을, 캣닢을 챙겨주자 선미가 보이지 않는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몇 번이나 밖을 내다보았다. 이틀쯤 보이지 않던 선미가 상처를 또 하나 달고 오면 속상했다. 선미가 된 큰 애는 내 기쁨이자 걱정이었다.
그 고양이가 그냥 큰 애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면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틀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짓지 않았으면, 그냥 길에서 사는 고양이에게 상처는 운명 같은 거라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거두지 않은,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생명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이름을 지은지 한 계절이 바뀐 후에나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