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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Nov 21. 2022

지금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어요

Le Cygne by Charles Camille Saint-saën


퇴사한 후에 당근마켓에 안 쓰는 것들을 파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것저것 팔다 보니 나도 여러 가지를 검색해보게 됐는데, 특히 바이올린 검색이 재미있었다. 방과 후 수업에 쓰다 사이즈가 작아져 파는 바이올린, 취미로 배우려고 샀는데 아기가 생겨 더 이상 할 시간이 없어져버린 바이올린, 어렸을 때 배우다 몇 년간 방치해 둔 바이올린. 저마다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다 다른 탭을 눌렀고, 레슨을 구하는 광고를 몇 개 읽었다. 당시엔 내가 사는 동네에 이제 막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던 때라 글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건만 사고파는 게 아니라 레슨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전에 몇몇 음악학원에 레슨 문의를 한 적이 있는데, 동네에 있는 학원은 어린이들이 많아서인지 성인 바이올린 레슨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레슨을 받지 않은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어렸을 때 5년 정도 배워 아주 초보는 아닌지라 내 진도를 부담스러워하는 곳도 있었다. 막상 시켜 보면 다 까먹었을 텐데, 초보도 그렇다고 썩 잘하지도 않는 어른이 갈 학원이 없었다.


당근마켓에서 레슨 광고만 며칠 보다 세 명의 선생님에게 채팅 상담을 받았다. 그중 한 분의 집이 걸어갈만한 거리였고, 성인 레슨도 가능하다고 했다. 퇴직금은 있었지만, 어렸을 때와 달리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어른이도 부담스럽지 않은 레슨비이기도 했고. 망설일 틈 없이 시범 레슨을 받았고, 20년 만에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곡은 어렸을 때 배웠던 바이올린 명곡집에 있는 생상스의 '백조'(Le Cygne by Charles Camille Saint-saën)였다. 서정적이고 노래하는 곡을 좋아한다. 백조는 어렸을 때 배웠던 곡이지만, 결국 노래하진 못한 것 같다. 이번에는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머리로 그리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선생님들은 꼭 30번씩 연습해오라고 했었는데, 30번을 채워본 적은 없다. 그리고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 이 음악은 어떤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다. 이렇게 쓰면 날림으로 배운 것 같지만, 아마도 그것이 당시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선생님들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정말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손가락은 굳었어도 그때보다 이해의 폭은 더 넓은 학생이 되었으니.


그렇게 백조로 3주가 지났다. 배운 것을 제대로 살려서 한 마디 한 마디 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이 곡을 할 때마다 머리로 상상하는 느낌은 여전히 머릿속에만 있었고, 이 곡의 서정성도 나 혼자 간직하는 비밀 같은 것이었다. 양손은 정말 바빴으나 그뿐이었다.


이제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3주가 지나자 선생님은 이제 다음 곡으로 넘어가자고, 그래도 아쉬우면 한 주 더 연습해서 다음 주에 끝내도 좋다고 했다. 한 주만 더 해보겠다고 하고 돌아오는 길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생각과 너무 달랐다. 어른이 되어서 배우면 정말로 배우는 곡들은 내 마음에 들도록 연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선생님의 레슨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너무 못했다. 매일 연습해서 매일 분명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도 내가 이렇게나 못할 줄이야.


일주일을 더 맹렬히 연습했지만, 역시나 해피엔딩은 없었다. 결국 백조는 날아오르지 못했고, 그렇다고 유유히 물가에 떠있지도 못했다. 물가를 조금 서성거렸다? 이 정도가 내가 연주한 백조일 것이다. 결국 그 정도로 백조를 마무리하기로 하면서, 나는 솔직히 얘기했다. 머리도 컸고, 몸도 다 커서 한 달 동안 이 곡을 배우면 완벽하게 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직까지 이렇게나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쉽다고.


지금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 한 거예요.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곡을 하면서 배우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고 나중에 이 곡이 생각나면 그때 다시 연주해보세요. 그때 알 거예요. 이 곡을 계속해서 연습하지 않았을 텐데도, 어느 순간 지금보다 이 곡을 더 잘하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아쉽지 않았다. 선생님 말대로 그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서 그런지 막상 악보를 덮었을 때 뿌듯했다. 한 달 동안 배운 게 정말 많았고, 그것들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익혔다. 이후로 다른 곡들을 공부하면서도 선생님의 얘기대로 그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차분히 했다. 여전히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히 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잘하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도 아니다. 잘한다는 것의 기준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었던 프로의 연주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어제의 나, 지난주의 나보다 나아졌다는 게 중요하다. 매주 조금 덜 엉망진창인 것이 즐겁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의 그 말은 너무나 맞다.


이제는 그 곡을 연습하지 않는데도 나는 매일 백조만 연습하던 그때보다 백조를 더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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