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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Nov 20. 2022

이번에는 꼭 잘해봐요

광화문 현악사

회사일에 지쳐 있었다. 하는 일은 여전히 좋아했지만, 이 회사에서 할 일은 더 없을 것 같은 상태라고 느끼던 차였다. 상황을 바꿔보려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근본적인 것이 바뀌지는 않아 모든 게 실패였다. 보기에는 달라진 게 없는 날들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기력과 싸우고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 그날도 아마 그런 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매일이 똑같은 날이라 한숨을 쉬면서 가는데 갑자기 지원이가 따뜻한 버블티를 한 잔 사줬다. 마침 감기까지 걸려 무기력하게 있으니 먹고 힘내라면서.



인간의 친절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던데. 탄수화물이 주는 건 그것뿐이 아닌 것인지, 따뜻한 버블티를 마시자 없던 긍정과 희망 같은 것도 생겨났다. 무슨 용기인지 집으로 가려던 걸음을 돌려 광화문 현악사로 갔다. 20년 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용기까지 탄수화물이 주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광화문 현악사.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늘 봐서 여기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를 정도로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지날 때마다 들어가 보고 싶던 곳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바이올린을 되살리기 위해 활, 송진, 그리고 어릴 때 늘 썼던 현을 한 세트 샀다. 이걸 사두면 이게 아까워서라도 정말로 시작하겠지 하는 마음에.



악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번 점검해줄 테니 가지고 오라는 말에 그 후엔 냅다 바이올린도 맡겼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할 수도 있었지만, 당장 하지 않으면 지난 20년 동안 몇 번 겪었듯이 다음으로 미루고 또 20년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장님은 바이올린을 찬찬히 보고, 바이올린 안에 있는 라벨(보통은 악기를 만든 사람과 지역, 그리고 만들어진 날짜 등을 적어놓는다. 오래된 외국 악기의 경우 라벨에 적힌 정보는 가짜일 확률이 높다)도 보았다.


이 분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듣는 제작자의 소식. 20여 년 전 악기를 구입할 때 한 번, 10여 년 전 다시 악기를 시작해보려고 할 때 점검받느라 또 한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소식이 반가웠다. 악기를 소중히 잘 다뤄달라고, 10년 전에 했던 말을 그 후로 한 번도 지키지는 못해 바이올린 케이스를 볼 때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었다.


이 악기는 아주 공들인 것 같아요. 그분이 당시 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 선에서 아주 정성껏 잘 만드셨네요.


이런 말은 귀하다. 새 악기를 팔려고 일부러 악기 험담을 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여전히 있다.


악기를 맡기고 며칠 후, 드디어 세팅이 끝났다. 바이올린에서 줄을 지탱하는 브릿지가 새롭게 바뀌어 있었고, 악기가 깨끗하게 닦여 새것 같았다. 악기를 방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점검 비용 겸 수리비가 꽤 나올 거라 예상하고, 비장하게 카드를 뽑아 들었다.


이거는 그냥 내가 해줄게요. 오랜만에 시작한다고 하니까 재밌게 했으면 좋겠어.


새 브릿지를 선물 받아 기쁜 마음에, 오래되다 못해 쿠션이 삭아버린 케이스를 버리고 새 케이스를 샀다.

새 활과 새 현, 새로운 송진, 새로운 브릿지와 깨끗하게 닦여진 악기. 모든 것을 담고 나니 정말로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다 준비됐으니 이번엔 꼭 잘해봐요. 이제는 어렸을 때처럼 푸시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정말 즐겁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브릿지를 왜 무료로 깎아 주었는지 모르겠다(일반적으로 브릿지 세팅은 브릿지 구매 비용+공임비가 곁들여져 책정된다). 다시 시작하려는 내가 굉장히 기대에 차 보였나. 아니면 현생에 많이 지쳐 보였나. 이런 응원은 처음이라 상대의 동력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의 따뜻한 진심이 느껴져 이번에는 정말 즐겁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몸에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 악기와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정말 즐겁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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