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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래 Jan 06. 2023

일기

하루의 유언장


멕시코에서는 죽음에 3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첫 번째 죽음은 심장이 멈출 때 찾아오고,

두 번째 죽음은 장례식이 끝나면 찾아온다.

그리고 더 이상 기억해주는 이가 없을 때 마지막 죽음을 맞이한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사감 선생님 두 분이 하루씩 번갈아 가며 기숙사를 관리했다. 미술 선생님과 국사 선생님이었다. 미술 선생님은 사감 경력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학생에게 많은 애정을 주셨고, 제자들의 성적 향상에 관심이 많으셨다. 특히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매일 30개의 수학 문제를 풀었는지 확인하시고 조언해주셨다. 마음이 나태해져 보이면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셨지만, 꾸준히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학교 내에서 선생님의 열정은 아주 유명해서, 언제나 사감 한 자리는 미술 선생님의 자리였다.


그에 반해 국사 선생님은 주어진 사감 업무 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생이 지켜야 할 것만 지키면 나도 터치하지 않겠다.’라는 의미 같았다. 열정적인 미술 선생님이 부담스러워서, 국사 선생님을 더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초점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숙사 자습실 복도를 돌아다니곤 하셨는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무표정한 얼굴은 싸늘한 표정과 닮아 있었고, 그 표정이 순식간에 깨져서 화나는 표정으로 바뀔 것 같았다.


기숙사생은 등교하기 전, 30분간 열람실에서 아침 자습을 했다. 아침 자습 시간은 언제나 '대환장 파티'였다. 자리에는 앉았지만, 칸막이 책상을 가림막 삼아 몰래 자는 친구들도 있었고, 사감 선생님의 눈치를 봐서 몇분 일찍 올라가는 사람, 씻다가 시간이 늦어져 느지막이 자리에 앉는 애도 있었다. 문제의 그날은 국사 선생님의 사감 날이었다. 오늘도 어김없는 혼란의 아침 자습 시간. 전례 없는 방송이 기숙사를 울렸다.



전원 기숙사 문 앞으로 집합.


짧았다. 그러나 불필요한 일을 만들지 않는 선생님의 방송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 투덜대며 나오는 친구들은 선생님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표정 관리를 시작했고, 서둘러서 내려온 척했다. 우리는 눈빛으로 누가 잘못한 건지 아냐고 물었는데, 누구도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아침 자습 시간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분명 잘못했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살아야겠다.' 생각하던 중 선생님이 말했다.


“저기 저 운동장 축구 골대 보이지... 저기 찍고 온다... 늦게 오는 XX들은 운동장 XX게 돌 줄 알아!”


선생님은 평온하게 말씀하시다 끝부분에 자신의 화를 토해내었다. '선생님은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것 같아.' 각자가 지켜본 국사 선생님의 모습을 조합해보며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역시 그런 것 같다. 이 선생님은 규율을 어긴 우리에게 명령하고, 복종시켜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나는 뛰었다. 뛸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전속력으로 뛰었다. 내 뒤로 친구들의 발자국이 들려왔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고, 준비되지 않았던 친구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안간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친구는 이날의 사건을 말해주었다. 본인만 살겠다고 전속력으로 뛰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는 가끔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뛰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날 아침이 그런 날이었는데, 이유가 생겨서 좋았을 뿐이었다. 물론 친구가 본대로 녀석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썼다. 내 이기적인 생각이 친구들을 난처하게 했다는게 웃겼다.



이렇게 잊혀진 추억이 얼마나 많을까.



조금 슬퍼졌다.

이렇게 소중한 순간이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지 모른다.


모든 순간은 나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진다. 폭포에 손 웅덩이를 만들어 대면 물 한 줌이 남는다. 그 물 한 줌이 기억 같았다. 그렇게 기억으로 남지 못한 순간은 있는 줄도 모른 채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순간은 곧장 기억으로 남아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그 기억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을 때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기억조차 사라져 버리면 마지막 죽음을 맞이한다.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일기장을 펼쳐 마지막 죽음을 앞둔 내 기억을 되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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