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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Dec 16. 2022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

#148 하버드대학 중국연구소 [하버드대학 중국 특강]


p.25

    현재의 중국 체제를 보면 베버가 말한 체제 정당성의 세 가지 근거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마오쩌둥 사망 이후 40여년 동안, 그리고 동유럽의 공산 체제가 붕괴한 후 25년 동안 중국의 공산 정권이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강압'만으로는 중국 공산 정권이 지금껏 건재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전의 일부 공산 정권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공안 기관이 그렇게 노골적이며 강압적으로 국민의 생활을 감시하고 갑섭하지는 않는다(동독의 비밀경찰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양한 기관에서 수행한 여론 조사 결과 중국 공산 정권에 대한 시민의 지지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학자 웬팡 탕은 저서 <대중영합적 권위주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핵심 정치 제도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신뢰, 국정 수행에 대한 만족도, 정치 체계 혹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측정해보면, 중국인은 다른 어떤 국가의 국민보다 자국 정권에 대해 일관되게 높은 지지도를 보인다. 중국인의 자국 정치에 대한 지지도는 심지어 대다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보다도 높다."

    물론 지지 여부와 정당성 혹은 합법성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과 그들의 정책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도덕적 차원에서까지 해당 정권에 국가와 국민을 통치할 권리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중국의 공산 정권이 현재까지 건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다. 마오쩌둥 시대 이후에 성취한 눈부신 경제 성장과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 증대에서 비롯된 이른바 '성과에 근거한 체제 정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p.57

    답을 찾기 쉽지 않으나 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던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누구에게 던지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한족을 포함한 대다수 중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티베트인, 위구르인, 몽골인이 불행한 역사를 써가는 이유는 소수 '불만분자들'이 완전한 독립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꿈을 꾸면서 사람들에게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됐을 때의 이점을 자꾸만 주입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가당치도 않은 헛된 꿈을 지지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국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에 대한 꿈은 결국 파국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으며 국가의 완전성을 해치기 때문에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한족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들이 좀 더 냉정하게 주변 현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티베트, 위구르, 몽골이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랜 세월 미개하고 가난한 상태를 면치 못했던 사람들이 중국이라는 큰 우산 속에서 궁핍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중국 정부의 아낌없는 자원 투자 덕분에 이제 비한족 사회에서 불공정한 노동 착취가 사라졌고, 빈곤이 퇴치됐고, 질병이 없어졌고, 수명이 연장됐고, 교육이 확대됐고, 교통을 비롯한 주요 기반 시설이 확충됐고, 전반적으로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됐다는 얘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족 대다수는 비한족이 국가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빚을 두고두고 갚아도 시원찮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국가가 그토록 후하게 대해 주는데도 은혜를 모른 채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기며 대항하고, 나아가 당과 국가에 반기를 들며 폭력 행위까지 일삼는 그들의 행동은 너무 이기적이며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티베트인, 위구르인, 몽골인에게 '왜 불행한지'를 물어보면 이와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온다. 사실 이들도 자국 영토가 중국에 병합된 이후로 물질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됐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자신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생각해보라고 반문한다. 알량한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그들이 치른 엄청난 대가를 생각하면 물질적으로 조금 나아진 현실에 대해 무조건 감사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했다고 하나(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정치 지도자들이 비한족의 각 지도자에게 직접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자신들은 잃은 것이 너무 많다. 전통적 생활 방식을 잃었고, 고유의 언어도 사라지고 있다. 더불어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 활동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말로는 '자치구'라고 하나 실질적 자치권이 없는 까닭에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고유 언어를 가르칠 수 없고, 아이들에게 원하는 방식대로 이름을 지어줄 수 없으며, 전통의상을 입거나 고유의 머리 모양을 할 권리도 없다. 이러한 일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 그 즉시 '테러리스트'나 '분열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색출한 뒤 온갖 고문을 하고 투옥시킨다.

    위구르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신장 지구에서조차 일자리나 임금에서 차별을 당하고 있고, 특별한 신분증명서를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등 미국인이 말하는 인종 프로파일링 racial profiling (피부색이나 인종 등을 기반으로 용의자를 추적하는 수사 기법 -옮긴이)의 대상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곳에서 그들처럼 살아보면 중국 정부의 방식이 실은 내부적 식민통치와 다름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또한 9.11 테러 이후 이슬람교(위구르인의 고유 종교)와 이슬람교도에 대해 느끼는

자동반사적인 공포증이 중국 정부가 그토록 억제하겠다던 극단적 증오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소수 민족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공안 기관과의 갈등뿐 아니라 다수인 한족과의 갈등까지도 겪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족과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 누구도, 중국 정부마저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지는 않는다. 관료사회전체가 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전히 갈등을 강압적으로 봉합하려는 이들이 있긴 하다. 주요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정치저널과 학술 저널에는 허용 범위 내의 다양한 각도에서

민족 문제를 조명한 논문이 넘쳐난다. 티베트의 반체제 작가 웨이 써트와 왕리 부부처럼 몇몇 용감한 사람들은 악화 일로를 걷는 작금의 상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탄압이 심해지고, 감시가 강화되고, 자유가 줄어들고, 처벌은 강해지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지하 저항 운동의 강도도 달라졌다. 결국 민족 갈등의 심화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한족과 비한족을 포함한 국민 전체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이제 중국 정부가 실효성 없는 통치 전략을 거두고, 좀 더 관대한 정책을 도입해 자치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러한 건설적 방향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다.



p.60

소련 해체의 길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중국공산당


민족 갈등은 중국 근대사를 얼룩지게 하며 내내 정부를 괴롭힌 골칫거리였다. 20세기 초, 국민당은 비한족 또한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이들이 한족의 규범에 동화돼 결국은 하나가 되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된 온정주의적 태도는 안타깝게도 비한족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한족의 불만에서 기회를 포착한 쪽은 공산당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비한족의 외면을 받는 '중국화' 정책을 버리고, 비한족 집단에게 더 큰 자치권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분리 독립권마저 부여하겠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헌법 제정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에 이 단서 조항은 없어졌으나, 소수 인종의 종교·문화·언어를 보호한다는 조항은 포함됐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한족우월주의'가 미칠 부정적 영향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비한족 집단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문화대혁명기에는 소수 민족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잠시 접어두기도 했으나, 1980년대에 다시 부활하면서 그들에 대한 비교적 진보적인 정책이 많이 시행됐다. 1990년대에는 소수 민족의자치권 요구, 특히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인의 요구가 거세질 것을 우려한 당 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 대부분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2000년대 초에는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이 국경을 초월해 등장하면서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중국은 오랜 왕조통치시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른 지금까지 전제 국가의 탈을 벗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족 문제에 관한 20세기 해법은 이제 내려놔야 한다. 중국 변방 지역에서 빈발하는 민족 갈등은 직접 당사자인 비한족 뿐 아니라 현 중국의 지배 민족인 한족에게도 엄연한 현실이다. 양쪽 모두 과거를 돌이켜볼때 각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소련의 해체 과정을 지켜본 중국공산당은 이와 유사한 일이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막고 싶어 한다. 비러시아 민족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것이 패착이고, 이 '잘못된' 정책이 소련 해체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티베트인, 위구르인, 몽골인 들 중에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의 토착민들이 직면해야 했던 운명이 자신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고유의 생활 방식은 없어졌고, 말살된 고유문화는 박제 신사가 돼 박물관에 보존된 채 관광객들의 눈요깃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앞선 나라들의 예를 드러내놓고 언급하려 하지는 않는다('원주민'은 중국에서 금기시하는 단어다). 그러나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위기는 쉽게 감지할 수 있다. 



p.119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 양국은 정책적으로 두 가지 전략적 과제를 떠안게 됐다. 첫째,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력 증강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상쇄시키는 일에 외교정책의 주안점을 둬야 한다. 미국이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효율적으로 상쇄시키지 못하면 동아시아 지역 국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더불어 동아시아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위상이 흔들리고, 해당 지역 내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에도 타격을 입을 것이다.

    둘째, 미국은 미중 협력을 증진하고 지역 안정을 촉진해야 한다. 미국은 양국 및 국제 사회의 이해가 걸린 수많은 사안을 떠안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중 양국간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약 군사적 충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비용 부담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미중 양국 간 군사 전략상의 경쟁 수위가 높아지는 것 역시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켜 미 안보와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p.152

    마지막으로, 1979년 이후로 타이완과 미국 양국 간 관계의 수준이나 강도가 꾸준히 증진됐다. 양국 간 방어 협력 및 경제 협력 강화에서부터 고위급 정부 인사의 상호 방문, 타이완의 국제기구 가입 노력 지지 등 곳곳에서 이러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양측의 입장 차를 해소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국이 양안의 '현상 유지' (평화적인 교착 유지) 원칙을 고수하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물론 '현상유지는 중국과 타이완 그 어느 쪽도 환영하지 않는다. 타이완은 주권국의 지위를 되찾기를 원하고, 중국은 타이완을 다시 본토에 편입시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은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양국 모두를 견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타이완을 향해서는 '분리 독립 주장으로 계속 본토를 자극한다면 그동안의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중국을 향해서는 '무력을 사용해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타이완을 지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음으로써, 타이완과 중국 그 어느 쪽도

자국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러한 방식을 취하면, 타이완이나 중국 모두 상대방이 섣부른 행동을 하더라도 미국이 저지하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자국의 행동도 자제하게 된다. '이중 억제'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정책이 타이완 해협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양안 관계 60년사를 보고 있자면 "더 많은 것들이 변해도, 더 많은 것들이 그대로이다"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타이완과 중국은 양립 불가능한 주장을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고, 미국은 양안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평화적으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교착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중간자적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다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어느 쪽도 속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을 풀기가 수월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복잡하게 꼬이는 듯하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상황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타이완의 민주화다. 민주화 추세가 강해지면서 타이완에 대한 정체성 지각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즉, 타이완은 국공내전의 패잔병이 훗날을 기약하고자 집결한 곳이 아니며, 중국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주권국 지위를 요구하는 국가라는 쪽으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타이완 사회는 자국의 국제적 지위를 이렇게 이해해왔고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변화된 정체성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간단히 말해 국공내전 시절과 달리, 타이완이라는 '영토'도 타이완을 통치하는 '정부'도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은 이제 타이완에서 발붙일 곳이 없는 상황이 된 듯하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타이완을 향한 중국의 구애 작전이 먹혀들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중국의 타이완 정책에 근본적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하나의 중국'을 기본 원칙으로 한 중국은 양안의 입장 차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과거에는 '일국양제'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타이완 측에서 볼 때 이는 그다지 흡입력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물론 변화된 상황에 맞춰 주권을 공유하는 공동 국가 혹은 연방국가 같은 몇 가지 타협안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가 영토 주권 일부를 타이완에 무상으로 건네줄 리 만무하다. 타이완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대다수 타이완인이 기정사실화한 타이완의 독립 주권을 포기하라는 중국 측의 요구에 타이완 지도부가 선뜻 응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실적인 측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타이완 수출과 해외 투자 부문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40%와 75%로, 타이완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역별 경제 권역이 형성되는 마당에 타이완이 고립을 자처하는 데에는 엄청난 손실이 따를 것이다. 또 타이완이 정치·사회적으로

더욱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질수록 중국과의 평화적 협상에 더 개방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는 한데 양안 중 한쪽이 현재의 교착 상태를 더는 참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타이완 지도부가 분리독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 또 중국 지도부가 현재와 같은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는 점진적으로, 평화적으로 타이완을 독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판단하에 무력을 사용해 갈등을 해소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이 극단적 시나리오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작용하므로 섣불리 그 전개 과정이나 결과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개입하리라는 점이다. 미국의 개입은 휴전 노력에서부터 군사적 개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시나리오가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양안의 긴장 고조는 국제적 위신 차원에서나 경제적 차원에서나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는 부분은 다들 알고 있다. 요컨대 현상유지 원칙을 깨 교착상태를 푸는 것은 양안 갈등의 세 당사자들 모두 원치 않는 시나리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현상 유지 기조를 바탕으로 한 교착과 긴장상태가 유지되는 한 적어도 얼마간은 양안 간 평화상태가 이어질 것이다. 이 같은 현상 유지는 중국, 타이완, 미국 중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선택지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수용하면서 불만스럽더라도 현 상태가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p.315

지금 중국에서 공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공자의 부활과 중국이 꿈꾸는 국가의 미래상


=20세기 내내 공자는 중국이 현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거부해야 할 모든 것들의 상징이자 화신이었다. 공자는 전통적 사회 질서의 절대적 지지자였다. 인간은 사회가 정한 의식과 절차를 통해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다하도록 사회화돼야 하며, 사람들이 저마다 제 역할과 의무를 다하며 살 때 비로소 조화로운 사회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 노릇을 잘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아내는 성실히 남편을 섬겨야 한다. 사회적 의식 또한 중요하다. 인간에게 우주 자체가 조화로운 체계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고, 더 나아가 조화로운 우주라는 더 큰 가치에 공헌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전통이 만들어놓은 대로 사회와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공자야말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궁극적 상징이었다.

    자기 인식을 중요시하는 현대적 시각은 공자의 사상과 정반대의 결을 지니고 있다. 현대적 시각에서 인간은 전통적 세계관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20세기 전반기 내내 중국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근대주의자들이 씨름했던 여러 이념들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1949년, 공산주의가 승리를 거뒀다.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을 향해 모두 일어나 새로운 평등주의 사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핵심에는 공자와 그의 사상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공자 부정'이 극에 달했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공산주의 세계를 창조하자는 명분 아래 공자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을 완수하고 난 뒤 20년 동안에도 공자 타도의 목소리를 높였다. 공산당 간부들이 마치 과거의 유림처럼 변하고 있으며, 폐기해야 할 전통적 사고방식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인민이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공산당 간부들이 과거 시대의 왕조에 맞서 싸웠듯이 이제는 인민이 당 간부들의 잘못에 반대해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린뱌오 같은 자신의 정적들을 타도해야 할 유교주의자로 지목해 탄압하기도 했다.

    근대주의자들이 전통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자기 자신을,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하를 통일한 후 위·촉·오 시대의 전통을 파괴하려 했던 진시황에 비유하기도 했다. 진시황은 전통적 세계뿐 아니라 과거의 전통을 새로운 사회의 근간으로 삼으려 했던 지식인들 또한 처단하려 했다. 이때도 공자와 그 사상을 추앙하는 세력은 멸시와 타도의 대상이었다. 진시황이 심지어 유학자와 유생을 생매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마오쩌둥은 자신과 진시황의 유일한 차이는 자신이 좀 더 무자비하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덕분에 진시황이 파괴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유교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시황의 비전(과거의 전통을 말살한다는 차원에서)이 실패했다면, 사실 마오쩌둥의 비전 역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비전은 위세가 꺾인 채 결국은 자본주의에 그 자리를 내줘야 했다. 실제로 중국은 20세기 말이 되자 가장 극단적인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유교 세계에서 벗어나 현대 세계로 나아간다는 수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만, 그 현대 세계가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중국은 극단적인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 결과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체제 전환의 결과 극심한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에서는 또 한 번의 자기 성찰적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적 가치를 상실한 채 부와 권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 세상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 속에서 다시 공자가 등장했다.

공자의 재등장, 구체적으로 말해 공자와 유교 사상에 대한 재고는 사실 20여 년 전에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먼저 시작됐다. 1980년대에 싱가포르는 기본적으로 시장 경제를 지지함과 동시에, 유능한 관료 사회가 자본주의 체계를 관리·감독하는 요소를 가미한 일종의 국가 자본주의 모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때 관료는 선거와 같은 민주적 방식이 아니라 능력주의원칙에 따라 선발됐다. 싱가포르 정부는 유능한 관료가 공공 인프라와 법체계를 담당하고 대중들을 통치하는 능력주의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유교적 가치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유교 사상은 서구 사회의 근대성에 내포한 개인주의와 탈도덕성을 치유하는 도구로서 등장했다.

    싱가포르는 '전통성' 대 '근대성'이라는 대립 구조 대신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초점을 맞췄다. 전통성과 근대성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공자는 파괴해야 하는 전통적 세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동서양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공자는 찬양해야 할 동양 문화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중국도 싱가포르가 적용했던 개념 틀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은 정부 관료의 선발 기준을 더욱 강화했을 뿐 아니라 공공 인프라, 교육, 녹색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서구 사회의 지배적 관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지배적 사조는 정부 권한 제한과 민영화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신자유주의였다. 하지만 중국은 성공적인 자본주의 체제 국가임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싱가포르처럼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를 재확립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미국의 경우 이익 집단에 휘둘리는 통치 구조라서 경제 불평등이나 기후 변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우나, 자신들은 유교적 통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주도권을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공자를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자신의 꿈에 가장 적대적인 인물로 인식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정권은 공자를 서구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항마로 인식한다. 유교적 통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중국 정부의 행보와 함께 두드러지고 있는 새로운 흐름도 있다. 한때 전통 문화라며 폄하했던 것들을 이제는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을 둔 국제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중국 정부는 중국어와 중국 문화 전파를 위해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이라는 일종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있다. 한때 파괴의 대상이었던 전통이 이제는 또 다른 비전으로 간주되면서 21세기 인류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까지 공자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전통적 세계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그림자인 소외, 개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좀 더 특수하게는 서구 통치 방식의 역기능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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