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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마 Jun 11. 2021

민선이에게

추 와이홍 - 어머니의 나라


안녕 민선아.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 추운 날이든 더운 날이든 너와 난 영화를 보러 다녔었던 거 기억하니? 극장 안에선 낮과 밤도 구별할 수 없고 날씨가 흐리고 맑은 것도 알 수 없는데다가, 남의 이야기를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듣는 셈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가진 현실의 문제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 너와 나, 석희 셋이서 액션 영화나 판타지 영화를 보는 동안 라지 사이즈 콜라를 마시며 인스턴트 같은 취향에 흠뻑 빠지던 순간을 기억해. 어렸을 때부터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순간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과는 언젠가 반드시 이별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라. 너의 직장 생활과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나의 영화 취향이 확고해지면서 너의 취향을 밀어내고부터는 우리가 극장에 가는 날이 줄어들었지. 석희는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이 그렇듯 성장하면서 여자인 가족 구성원들을 무시하기 시작해서 우리와 주말마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걸 점차 수치스럽게 생각한 듯 해. 물론 민선이 너는 그런게 아니라고 끝까지 석희 편을 들겠지만.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올해에는 더더욱 영화 보러 갈 일이 없었어. 너는 너의 건강에 대해서도 나의 건강에 대해서도 엄청 예민하게 구니까. 나는 기다렸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혼자서 극장에 갔어. 올해 봄에 <패왕별희>라는 영화가 재개봉을 한다고 했어. 내가 태어나던 해, 그러니까 네가 나를 덜컥 임신해서 탐탁지 않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던 그 해에 이 영화가 개봉했대.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며칠을 앓았어. 몸에선 열이 나는 것 같은데 막상 재보면 열은 없고, 음식은 소화되지 않고 입맛도 없고 밤엔 잠드는 게 무서울 정도였어. 나는 이 영화를 청데이(장국영)의 세계가 부서지는 과정으로 읽었거든. 누군가의 세계를 부수는데 사랑이나 폭력 같은 것은 분명 중요한 작용을 해. 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볼 수 있듯 국가적 폭력은 더욱 치명상을 입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시기에 중국은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학교마다, 동네마다, 각 가정마다 존재했다고 할 정도로 그 수가 엄청났대. 그들이 부수고 싶었던 건 구습, 구사회였다는데, 자국의 문화재를 폭파시키고 교회와 절을 철거하고 거기 있던 종교인들까지 처벌했어. 자기들이 사는 동네에 예술가가 있다고 하면 그 집에 쳐들어가 물건을 때려 부수고 사람을 끌고 가 인민재판을 했대. 청데이와 단샬로(장풍의)는 경극배우니까 당연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어. 비극적인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를 굴려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여러 경우의 수를 갖다대보아 이랬으면 주인공이 행복했을까? 상상해보는 거지. 근데 이 영화는 정말 답이 없어. 역사와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데, 청데이는 경극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필연적으로 공산당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람인거지.



영화를 보고 며칠 밤잠을 설치고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몸이 저리듯 아픈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일지 몰라.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충격을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 못해서 너와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얘기를 했었지. 현대사는 사실 너무 무섭다고. 나는 박근혜의 얘기를 했어. 박근혜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에세이를 낸 적이 있는데 이 에세이도 내가 태어난 93년도에 출판됐다고 하더라고. 내가 존경하는 정희진 선생님은 자신의 저서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서, 이 책을 비평하며 이런 결론을 내려. “이 책의 ‘역사적 성취’는 박 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절대로 알 수 없음을 증명했다”고.(p95)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특이한 인생도 없을 텐데, 저자의 경험과 캐릭터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고.(p95) 이 말을 하는데 일순 너와 내가 소름 돋아 했던 걸 기억해. 그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도 특징도 없는 글의 반복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박근혜‘로 상징되는 것들 – 한국의 보수, 여성성, 비리, 독재, 대통령, 비극적인 개인사- 은 그런 텅 빈 공백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거야. 그리고 난 혼자 이런 생각을 했어. 훗날 한국 영화판에선 박근혜라는 인물을 분명 캐릭터로 만들고 싶어 할 텐데 그들은 그럴 재주가 없다고. 왜냐면 한국에서 영화를 하는(그러니까 대부분의 남성 감독과 남성 제작자)사람들은 뻔히 알 수 있는 여성들조차 후지게 재현하는데 박근혜같이 알쏭달쏭한 현대사의 문제적 인간을 캐릭터로 만질 재능이 없다는 거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패왕별희를 본 직후보다 더 무서워졌어. 결국 현대사 속에서 개개인은 너무 쉽게 지워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너무너무 무서웠던 거야. 사람을 입체적이고 다변하는 존재로 보지 못하고 마는 것. 박근혜가 자신을 셀링했던 이미지나 훗날 영화의 캐릭터로 소비될 미래에나, 그는 그런 애매모호한 이미지겠지. 그게 무서웠어. 악인이든 선인이든 사람을 납작하게 소비하는 이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요즘은 너무 자주해.



민선아, 나는 최근에 모계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대한 책을 읽었어(추 와이홍 ‘어머니의 나라’) 그 모계사회는 공교롭게도 중국에 위치해있어. 나는 중국 현대사에 얽힌 서사로 괴로워하다가 중국 대륙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삶을 들여다보며 위로를 얻은 셈이야. 루구호 주변에 살고 있는 모쒀족은 거무산신이라는 신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거무산신의 성별은 여성이야. 민선아, 나는 너와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12년째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한 번도 신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어. 교회 벽에 그려진 그림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은 늘 남성의 모습이었거든. 모쒀족은 여성 신을 섬기는 만큼 여성이라는 존재를 더욱 상서롭게 여겨. 대를 잇는 것도 딸이고 어머니가 집안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지며 이름 앞에 붙는 성도 모계혈족이 사용하는 공간 이름으로 지어. 우리가 살아온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야. 만약 너와 내가 이런 공동체에 살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남자 형제들이 받는 지원을 못 받아서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닐 일도 없었을 거고 너와 새엄마가 반목하며 네가 쫓기듯 집을 나갈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20대의 네가 밤을 새며 일을 하고, 그렇게 일만 하고 할머니만 의지한 채 살다가 어느 날 새벽 자취방에 들어왔을 때 죽은 할머니를 마주하는 경험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해. 가부장제 사회가 말하는 정상가족이 없다는 거에 사무치게 외로워하면서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랑 결혼하지도 않았겠지.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너와 내가 둘 다 뿌리가 없는 사람들처럼, 외딴섬으로 남는 일도 없었겠지.



모쒀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다가 나는 또 문혁과 마주하게 돼. 그 시기에 홍위병들은 모쒀족이 사는 루구호에까지 도달해서 구식 풍습을 지워버리겠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문명화 시키려고 했대. 그 문명화란, 일부일처제의 법률혼 생활을 하란 거였어. 다행이 문혁의 바람이 지나간 후 모쒀족은 세이세이같은 자유로운 연애 풍습이나 주혼을 하는 등 본인들만의 가모장제 사회를 이어나갔어. 문제는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 루구호가 관광지화 되면서 도시에 살던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일반적인 세계’를 모쒀족들에게 심어 놓은 거야. 현금 경제라든가 일부일처제의 법률혼 같은 것들. 누군가 강제로 삶의 양식을 정해주는 것보다 기술의 발달이나 사람과의 교류가 확장되는 힘이 더 크다는 게 절실히 느껴지더라. 모쒀의 아이들은 전통적인 방식대로 사는 걸 점점 거부한대. 집안을 도와 농사를 짓는 삶 말고, 도시에 나가는 걸 선택하기도 해. 정말 세상 모든 게 유한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청데이의 경극 인생이 끝나고, 패왕이 우희와 이별하고, 우리 가족이 극장에 다니던 시간들이 다 지나가버린 것처럼.


그럼에도, 언젠가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와 내 세대의 행복을 만들고 싶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나는 언젠가 끝이 난다고 하더라도 이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숨을 쉬고 살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 이를테면 이런 거지. 코로나와 신천지가 한참 뉴스를 도배했던 바로 몇 달 전 일을 기억해? 그때 대구 임대아파트가 코호트 격리 조치가 됐었어. 그 아파트 전체 세대 중 거의 대부분의 세대의 사람들이 신천지 신도였던 거야. 너와 나는 그 뉴스를 보면서 세상이 진짜 무섭다고, 소름이 끼친다고 했어. 그리고 며칠 뒤에 나는 월세 몇 만원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여성들이 종교에 의탁하게 되는 건 소름이 끼친다기보다 안타까워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했어. 그리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아파트에서 질병과 사이비종교라는 키워드를 걷어내고 보면, 여성들이 하나의 아파트에, 각자가 세대주가 되어 살아가는 건 상당히 낭만적이지 않나 싶어. 예전에 서울 생활을 할 때, 나는 서울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들을 답사하듯 돌아다녔어. 압구정 현대 아파트도 신기했고 잠실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는 생각보다 깔끔해서 놀랐던 기억이 나. “너는 대체 왜 그런 낡고 후진 곳에 이상한 낭만을 품고 있냐” 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 납득되지 않는 낭만은 훗날 내가 꿈꾸는 것들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믿어. 낡은 아파트들은 2020년인 지금에 와서 내가 꿈꾸는 세계와 구체적으로 만나게 됐거든.



대구의 그 임대아파트처럼 처음부터 빈곤층 여성을 한곳에 모아두기 위한 목적 말고, 한때 잘나가던 아파트가 세월이 흘러 낡은 공간으로 변하고, 그곳이 여성들의 공간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나는 사실 서울의 그 많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되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이런 상상을 종종 하게 돼. 너와 나처럼 가난한 여성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집이 투기의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로 있다면 어떨까 하고. 사실 청춘시대 같은 드라마를 보면 여성들이 한 집에서 살아가는 게 굉장히 좋아 보이잖아. 그렇지만 태생적으로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만의 공간이 절실한 여성들이 각자의 집을 갖고 살아가는 게 더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친구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이 앞집, 윗집, 아랫집에 있어서 엘리베이터만 타면 언제든 만날 수 있고, 모든 것을 차단시키고 싶을 땐 현관문을 닫으면 돼. 사실 모쒀족 이야기를 보면서 납득이 가지 않았던 건, 왜 여성은 문명을 가질 수 없는가에 관한 문제였어. 어머니의 땅, 모계사회는 왜 이렇게 문명과 멀리 있는지. 심지어 매드맥스나 원더우먼 같은 대중 미디어에서도 여성들의 공동체는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드넓은 녹색의 땅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의 이미지. 난 태어날 때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페미니즘을 하는 대부분의 여성들도 앞으로는 도시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나는 내 욕망을 드넓은 평지가 아니라 아파트라는 수직 세계로 이동시켰어.



수직으로 뻗은 건물은 차가운 이미지이고 때로는 남성적 메타포로도 쓰여. 그치만 나는 타워팰리스처럼 끝까지 쭉쭉 뻗어나가는 욕망을 가질 생각은 없어. 내가 사랑하는 낡은 아파트들은 아담하고, 각 동마다 거리를 이상적으로 유지하고 있어. 그곳에선 배척당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성별도 성정체성도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가 환대 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해. 그런 곳을 너와 내가 간다면 인생을 다시 태어난 듯이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여름의 초입에서 서정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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