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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전일생 Dec 08. 2021

살아가고 있나 살아지고 있나

주체성 주도성 그리고 자존감


어렸을 때부터 김윤아를 좋아했다. 자우림으로 처음 접한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예뻤고 라디오 진행을 할 때의 그녀의 단어 선택은 항상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 그녀가 쓴 가사 또한 심금을 울린 것은 당연했다. 힘든 일을 겪었지만 그 아픔을 너무나도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냈고 외모 또한 평균 이상으로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가끔씩’의 가사 중

나는 살아가는 것일까

그저 살아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리고 ‘샤이닝’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이 가슴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있네.


결혼 생활 내내 마음이 헛헛할 때 자꾸 생각나던 가사다. 요즘에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로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만 나에겐 20년 전부터 정확한 실체 없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주제이다.


나에게 슬픈 노래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의 존재에 대한 고뇌가 담긴 이야기였다. 이별노래는 그저 흔하디 흔한 신파로 다가와 지겨웠지만 후자는 항상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인생의 역경을 딛고 극복하는 스토리가 사랑과 이별의 스토리보다 감동적이고 슬펐다. 삶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에게 이성과의 사랑은 어쩌면 작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보통의 소녀가 아닌 조금은 염세적인 아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청소년 시기에는 참으로 시간이 많았다. 결혼하고 육아를 하고 물리적인 시간이 없어지자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까맣게 잊고 살았다. 새로 꾸린 내 가족에게 상처 받기 전까지는.


시월드에서는 그런 마음은 사치였고 시간이 많아서 딴생각을 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무도 내가 힘든 상황이고 배려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금만 더 자신을 챙겼더라면, 조금만 더 내 목소리를 냈더라면 이렇게 극으로 치닫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니 요즘 말로 자존감이 더 있었더라면.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혼을 결심한 그날.

첫째는 방에서 줌 수업을 하고 있었고 나는 2층에 있었다. 여느 때처럼 딴짓을 하며 줌을 켜 둔 터였을 테다. 책도 펴지 않고 딴짓하고 있는 아이는 아빠에게 혼이 나고 있었고 조만간 2층에 대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냥 말투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그렇게 나를 불러 딸의 옆에 세워두고 아이를 혼내기 시작했다.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었다. 앞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나에게는 말이다. 혼내고 있는 남편을 제지하기엔 아빠의 권위가 떨어지는 상황이라 보통은 잘 끼어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를 혼내고 있는 상황에서 나를 옆에 세워두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보면 나의 배려와는 정 반대의 의미이지 않을까.


가부장적. 권위적. 시댁의 분위기는 대체로 그렇다. 친정의 분위기는 민주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살면서 '조선시대도 아니고'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주의적인 게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누구도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서 어떤 결정을 하던 그 의견은 존중받는다. 그것이 설마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이라 해도 그런 의견은 접어둔다. 혹여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누굴 탓하는 법도 없다. 그냥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생각해보면 시월드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그러게 내 말을 듣지 그랬어'라는 반응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그 결과를 낳은 결정을 한 사람은 고집을 부린 것이 되고 당사자는 그 결정과 결과에 대해 변명하기 바쁘다. 가족이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닌 '사회' 그것이 내가 느끼는 시월드다.


나는 사회생활의 경험이 적다. 그 점이 결혼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이리 치명적인 단점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에게 가족이란 모자란 부분도 감싸주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적은 사회생활에 대해 크게 걱정해 본 적도 없었다. 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시집살이는 '샤이닝'의 가사가 절로 생각나게 했다. 그렇게 항상 마음이 허했고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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