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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5. 2022

인형의 꿈

@ 오타루


저는 시간과 공간에 묶여 

더 이상 춤추고 노래할 수 없네요.

인간은 자유라는 뜻이라던데,

자유롭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요.


시간과 공간의 실타래와 함께 

다시 한번 왈츠를 출 수 있다면

그건 참 황홀한 기분일텐데.


그대, 이젠 제법 춤을 잘 추시겠죠.

당신의 부드러운 노래와 아름다운 춤사위를

짐짓 무표정한 표정으로 황홀하게 그려봅니다.


부디 그대의 세상은 온전하기를.




'나'라는 것은 참 묘하다.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터인데 실은 알지 못한다. “내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지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반영이 바로 자신이라고 오해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런 '환상 속의 그대' 혹은 ‘아상我相’이란 자기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힌 채 온전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작은 교육적 묘기’라며 이런 상황을 몇 개의 점과 도형으로 설명했다. 

플라톤은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원 같다고 했어요. 나는 이 플라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칠판에다 원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원에다 가로 선을 하나 긋지요. 그러면 이 선의 위는 의식, 아래는 무의식이 됩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을 표시합니다. 즉 가로 선 밑에 점을 찍는데, 이 점은 조금 전에 그린 원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원 속의 가로 선 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


우리가 의식하는 나라는 사각형은 우리라는 존재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칼 융은 이를 ‘자아(ego)'와 ‘자기(self)란 개념으로 분리했다. ‘자아'는 우리의 의식,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자신의 전부를 말한다. 말하자면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더 큰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 나아가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가? 


아마도 새로운 출발점은 겸손해지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순진한 착각부터 멈춰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합리적이지도,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강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커다란 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건 마치 우주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과도 같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중심이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어야 한다. 내가 갇혀 있는 이 작은 감옥은 또 다른 나를 향한 하나의 문이자 유일한 출구이다. 그러니 부디 “문(門) 열어라 꽃아. 문(門) 열어라." **




* 조셉 캠벨, <신화의 힘>에서


** 서정주, <꽃밭의 독백(獨白)-사소단장(婆蘇斷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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