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짱구아빠 Apr 20. 2022

「봄」, 공교롭게도

서로에게 다르게 적힐 말들, 3월




2022년 3월의 한 단어 , '봄'


공교롭게도, '봄'


© maartendeckers, 출처 Unsplash


봄을 주제로 한 글을 어떻게 쓸까 궁리하다 보니 참 오랜만에 소리내어 '봄'이라고 말해본 것 같다. 생동감이 움트고 가능성을 선보이는 시작의 계절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이 봄을 꼽을 것이다. 그러니 봄이 주는 이미지라 하면, 파릇하게 싱싱한 새싹과 이미 화사하되 과하지는 않은 꽃송이가 떠오른다. 생동감이 움트고 가능성을 선보이는 시작의 계절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이 봄을 꼽을 것이다. 씨앗이 새싹과 꽃이 되는 계절이 바로 봄인 것이다.


아이유 굿즈 '라일락 다이어리' 첫 장에는 독보적 국힙원탑 절세미녀 섹시디바 아이유가 사계절을 담아낸 문장이 있다.


"봄 한 송이, 여름 한 컵, 가을 한 장, 겨울 한 숨."

© tegethoff, 출처 Unsplash


사계절을 어쩜 이렇게 질서정연한 문장으로 선명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표현의 탁월함을 떠나서 누구든 각자 계절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마음 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큰 틀에서는 겹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환하는 계절이 남기는 선명한 이미지. 모름지기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워야 하는 법. 후텁지근한 무더위 뒤에는 반드시 매서운 추위가 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계절감 안에서 지나간 그 계절을 기억하고, 다가올 그 계절을 준비한다.


아마 교과서에도 실려있던 글이었을 텐데, 이규보의 '괴토실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번역하자면 '토실을 허물어버린 이야기' 정도 되겠다. 이야기인즉슨 어느 추운 겨울날 이규보가 집에 와보니 아들들이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연유를 묻자 아들들이 답하기를 겨울에 화초나 채소 손질하기에 좋고, 길쌈하는 여자들이 춥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이에 이규보가 화를 내며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사계절의 한결같은 이치이다. 만일 이에 반하면 괴이한 일이 된다."라고 하였다. 결국 아들들은 이 움막을 헐었고 그 재목을 땔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요컨대,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한 것이니, 춥지 않을 요량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그 와중에 본인은 춥지 않기 위해 살뜰하게 땔감을 챙기는 이규보의 인성은 반드시 짚어볼 대목이다)


© allisweeell, 출처 Unsplash

한국에는 이렇게 움막을 마련할 정도로 추운 겨울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겨울을 까맣게 잊을 만큼 후텁지근한 여름도 있다. 이렇게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이니 계절감이 그리는 진폭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계절감이 무뎌진 느낌이다. 적어도 이규보와 비교했을 때, 현대인이 체감하는 계절의 진폭이 많이 작아진 것 같다.



하루 24시간을 두고 일상에서 실제로 체감하는 온도를 따져봤을 때, 이제 차라리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춥고 따뜻한 감각이 계절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귀천이나 주거공간의 격차를 시사한다. 자연의 섭리로 전해지는 계절감을 사회의 질서로 구성되는 계급성이 대체하는 시대이다.



계절감이 마비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이러나 저러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은 엄연하다. 이 순환을 온도와 강수량의 변화로 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주기적인 이벤트의 발생으로 파악할 뿐이다. 학교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비교적 기관의 행사와 계절의 변화가 착착 조응하는 편이다. 계절감에 무감하더라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간고사가 임박했다는 것은 봄날의 벚꽃이 만발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 Kollsd, 출처 Pixabay

 그렇다면 역시 봄은 입학과 개강의 계절이다. 가을 또한 개강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반수의 계절이기도 하니, 봄이 주는 설렘과 활기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일 년 중 대학가가 가장 붐비는 계절이 딱 지금 이맘 때 쯤이 아닐까. 시작이라는 단계는 가능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여물지 못했음, 미성숙(반숙이 아니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봄날의 흥성이는 대학가는 그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질서로 치닫기도 한다.


모임을 쇄신하고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무리함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간에 섬찟한 자극을 주기 위해 건강을 탕진하는 이들도 있고, 뒷말만 남기고 종강 후 쫓기듯 군대에 가는 운명을 예정하는 줄도 모르고 둘 만의 관계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다. 대학원생마냥 저 속세의 번잡함과 연을 끊고 고매하게 지성의 전당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니었다. 아무튼 물끄러미 이즈음의 대학가를 보면 새싹과 꽃봉오리고 나발이고 그와는 아무 상관없이 너도나도 모여나와 에너지든 뭐든 무엇이든 분출해내는 계절을 실감한다. 이 지점에서 저 위의 아이유의 명문은 다시 쓰일 필요에 직면한다.


"봄 한 잔, 여름 한 컵, 가을 한 사발, 겨울 한 병"


© bucerius_law, 출처 Unsplash

그런데 역병이 창궐하였다. 자연의 사이클이 이미 희미해진 마당에 사회의 사이클 또한 정지해버렸다. 거리에 학생들은 자취를 감췄고 가게는 하나둘 문을 닫아갔다. 중간고사 때문에 벚꽃과 단풍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사라졌고, 봄날의 끄트머리에서 축제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점점 절정으로 향해가는 여름 안에서 농활을 준비하며 땀흘리는 사람들도 온데간데 없어졌고, 세밑부터 둘러앉아 새내기를 위한 행사 프로그램을 궁리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학교에는 시간의 경과에는 민감하지만 계절의 변화에는 무신경한 사람들만 남았다. 직업인으로서의 교수와 그를 바라보면서 흔들리지 않고 하루를 쌓아가는 대학원생들뿐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이 찾아오는 허기 때문에 무시로 들려오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를 빼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매일같이 조용한 모습으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산간 오지 절간 같던 학교였는데, 새살대는 소리가 잦아들고 흥성대는 발걸음이 끊기면서 세상의 변화와는 담을 쌓은 회색 별천지가 되었다.


© hirobi, 출처 Pixabay


그러한 시절이 벌써 햇수로 2년을 꽉 채우고 넘쳤다. 그리고 이번 학기부터는 대면 강의로 개강을 맞이하였다. 학교에 학생이 돌아오니 이제야 봄을 실감하게 된다. 캠퍼스 이곳저곳 시끄럽기 그지없는 조잘거림, 학생식당 입구를 꽉 막아대는 북적거림, 마을버스 앞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길게 늘어선 줄, 학교는 싫지 않은 사소한 불편함으로 다시 계절을 내보이고 있다.



계절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이 절간 같은 학교에 이제 정말 계절이라는 것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생동감 넘치는 싱그러운 빛깔의 봄으로서. 비록 그 싱싱함이 이제는 나의 몫이 아닐지라도, 회색빛에 가리어 잠시 잊고 있었던 어떠한 감각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히 족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밖에서 너도나도 연신 꽃과 자신을 카메라로 담고 있는 모습을 턱을 괴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Written by. 공교롭게도






독서모임, 우리들의 인문학 시간

https://blog.naver.com/ysgravity3659/221775696915


우리들의 인문학 시간, 글쓰기 모임

https://brunch.co.kr/@thebooks/169




매거진의 이전글 「수만 겹의 꽃봉우리」, 한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