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내고 훌쩍 떠난 유럽미디어아트 순례기
프랑크푸르트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를 달렸을까요. 아담한 도시 카를스루에에 도착했습니다. 미디어아트 투어의 본격적인 첫 번째 코스, ZKM(Center for art and media)을 보기 위해서요. 다른 도시들과 동떨어져 있는 편이라 루트를 조정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지만 유럽의 미디어아트를 둘러보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의 예술과 기술 박물관을 빼놓을 수가 있을까요! 특히 카를스루에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미디어아트 도시일 정도로 온 도시가 융합을 외쳐대고 있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마침 여름에만 열리는 카를스루에궁전 매핑 페스티벌도 열린다고 하니 미디어아트 덕질을 하는 저에게는 ‘머스트’ 코스였습니다.
오랜 비행의 피로도 싹 잊게하는 뭉게구름. 메말랐던 마음이 간만에 뭉실뭉실대는 것을 느끼며 ZKM으로 향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예술과미디어센터 ZKM은 카를스루에 예술대학을 거점으로 미디어아트가 꿈틀거리며 태동하는 싱크탱크입니다. 박물관과 공연장, 세미나실, 연구소로 이루어진 한마디로 예술과 기술을 우당탕탕 결합하는 ‘미디어아트의, 미디어아트에 의한, 미디어아트를 위한’ 공간이에요.
물론 매력적인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당연하지만, 이 곳에 의외로 제가 매료된 포인트는 바로 공간이었죠. 세련되었다기보다 투박한 날 것 그대로의 마치 공연장 백스테이지 같은 전시장과 미디어아트의 조합이 묘하게 강렬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버려진 탄약공장을 개조하여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공간이 주는 이 묵직함 덕택에 더욱 몰입감있게 작품 감상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ZKM의 매력적인 공간들, 그냥 지나칠 수 없죠! 하나씩 뜯어서 잘근잘근 살펴보아요.
ZKM의 공간을 한 눈에 보여주는 로비. 마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와있는듯한 느낌도 드는데요. 티켓부스와 서점 그리고 카페가 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국의 세련된 미술관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리가 있나요! 기념품과 예술서적이 가득한 서점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구하기도 힘든 미디어아트 관련 서적들이 재고로 쌓여있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본고장은 다르긴 다른가봐요.
'투박하다. 어둡다. 네모낳다.'
그러나 그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나무, 빛, 포스터, 예술작품 덕택에 동시에 이 곳은
'몽환적이다. 때론 강렬하다.'
평소에는 공연장으로 쓰이는 네모난 공간. 하늘색 라인테이프 마저 현대미술의 작품 중 한 부분 같아 보입니다. 투명한 유리로 덮힌 천장 덕택에 자연광이 가득내리쬐고, 매 시간 달라지는 구름의 위치에 따라서 공간감도 쉴새없이 변해서 미니멀한 실내 속 자연의 요소를 느낄 수 있어요.
그냥 계단. 이라고 하기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곳들이에요. 초록빛 불이 켜진 곳에는 한국인 작가 김희천씨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한국말이 나지막히 계속 통로를 울리고 있었어요.
더 재미났던 점은 곳곳에 숨겨진 ZKM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인테리어 요소들이었어요. 창문으로 비춰오는 커다란 나무와 실내의 나무 그리고 계단 사이의 LED 전광판. 나무와 톤앤매너를 맞춘 귀여운 연두색 텍스트에는 전시관의 타임테이블이 적혀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틈새 공간을 저렇게 위트있게 기획하고 또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이 너무나 부러운 기획자 1인이었습니다.
잠시 커리어적인 이야기로 새볼까 합니다. 지금 저는 크리에이티브 기획자라는 잡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요. 주로 BTL 광고 혹은 미디어아트에 사용되는 콘텐츠 기획부터 실행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디어에 관련된 전반적인 것을 다-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공대생인데 예술이 좋아서 이 업계에 발을 들이기까지 자동차 부품회사에서부터 스타트업, 연구소들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편이에요. 이전에는 불만이 생기면 여기가 아닌가보다 하고 아예 새로운 곳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프로세스를 반복하다보니 내가 있어야할 큰 틀정도는 어렴풋이 만들어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고나니 이젠 저의 자세를 다듬을 차례라고 느껴집니다. 요새는 일을 할 수록 해야하는 일만 하기보다 한 단계 앞서서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해내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소모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괴롭게 되고마니까요. 내가 궁금해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연두색 LED 계단을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독특한 텍스트와 그래픽들의 향연, 포스터에 매료되다.
이번 여행에서 반해버린 것들 중 하나는 바로 포스터. 심플하고도 유니크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의 조합이 그냥 벽에만 붙여놓기엔 너무나 아까웠어요. 저에겐 포스터들 덕에 의미없는 벽들이 또다른 전시관으로 느껴졌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대어 그 아름다움들을 담아보았습니다.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인 타이포그래피. 글자간의 간격과 굵기만으로 저리 세련될 수가 있다니!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배워보고싶은 분야기도 합니다. 이렇게 계속 궁금해하고 배우고싶다보면 뭐라도 되어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걷고 걸었습니다.
카를스루에 예술대학교와 전시관은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어있어요. 그리고 그 통로마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계속 찰칵 찰칵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명화같은 광고포스터로 파리의 거리 전체를 미술관으로 바꾸어버렸다는 찬사를 들은 알폰스무하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를 좋아라합니다. 어릴적 한 주 내내 손꼽아 기다렸던 아파트 주차장에 잠시 오는 도서관 버스부터, 학창시절 시험기간에 잠시 할 걸 미뤄놓고 하루키의 책들을 펼치며 느꼈던 길티플레저, 회사 근처 북카페에서 잔뜩 늘어져있는 잡지들을 뒤적거리며 머릿 속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요즘까지. 도서관은 내게 늘 가까운 도피처이자 놀이터가 되어주곤 하는 고마운 곳이죠.
왜 그리 도서관이 좋은지 그 요소들을 생각해보니, 서점이 아닌 도서관 특유의 묵은 책냄새 그리고 그 묵직함이 형성하는 막으로 인해 바깥으로부터의 소음이 차단되어서 세상에서 멀찍-이 동떨어져 있는듯한 그 느낌을 저는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가지 요소를 완벽히 갖추고 있던 곳, 카를스루에 예술도서관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모던한 도서관 안에 예술과 관련된 온갖 서적들이 다 모여있습니다. Sound art, Bio art 처럼 다소 생소한 분야의 책과 자료도 가득합니다. 홀린듯이 도서관 구석 구석을 탐닉했습니다. 불현듯 하루종일 이곳 콕 박혀서 양 옆에 책을 쌓아두고 연구하고 싶다는 갈망이 샘솟았어요. 책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또 다른 책을 찾아 헤메고 그렇게 마치 무언가에 미친 사람처럼 갈증을 채우는 장면을 상상하다보니 금새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득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서관을 떠나왔습니다.
(2편에서는 전시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