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입는 사람
이진희는 세계를 만든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걸 만드는 일이다.
이진희는 세계를 만든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걸 만드는 일이다.
이진희는 세계를 만든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걸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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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는 무대 의상 디자이너다. 오랫동안 연극 의상을 제작했으며 영화 <간신>, <안시성> 드라마 <바람의 나라>,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아, 드라마 <하얀 거탑>의 의상도 그녀가 제작했다.
이진희 디자이너의 작업에 관해 파격과 혁신, 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다. “창작자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잖아요!” 그녀는 한국 드라마의 수술실 풍경을 바꾸었다. “의학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수술실에서 의사들이 녹색 수술복을 입고 있었어요. 수술실은 현대화된 구조로 바뀌는데 의상은 여전했던 거죠. 그래서 <하얀 거탑> 때 수술실 유니폼을 파란색으로 바꿨어요. 파란색이 주는 현대적인 느낌이 녹색의 안정감보다 드라마와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진희는 옷이 언어라고 생각한다. “의상으로 드라마나 영화의 톤 앤 매너를 잡아 나갑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본인이 론칭한 의류 브랜드 ‘하무’의 쇼룸에서 그녀가 말했다. 부드럽고 단호한 어조로.
이진희의 의상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부터다. 기존 사극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렸다. 뭐랄까, 한복이 감각적이었달까! “옷감에 신윤복의 미인도를 디지털 프린팅했어요. 기존의 한복 소재가 아닌 낯선 소재로 옷을 만들기도 했고요.” 당시 나는, 이건 거의 인식의 전환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만큼 놀랐다. 한복이 아름다운 건 알았지만, 사실 나에게 그건, 전통미에 관한 정서이지, 실질적인 음, 와, 너 옷 예쁘다,라고 할 때와 같은 현실의 정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에서 배우들이 입은 한복은, 음, 옷으로서 예뻤다. 젊고, 패셔너블했다!
“그런데 그때 너무 화려해졌어요.” 그녀는, 어쩌면 조금 과했을 수도 있다는 맥락으로 저렇게 이야기했는데, 내가 정확하게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 보기에 따라선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사극이었고, 전통 의상이었으니까. “그래서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한복의 원형을 따르면서 색채만 감각적으로 표현했어요. 현대와 소통할 수 있는 색으로요.” 말이 필요 없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자. 오랫동안 사극에서 보아온 한복과 컬러 톤이 다르다. 이런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지만, 동시대적이다. 같은 빨강이라고 해도 채도가 높고, 혹은 더 부드럽다. 이전의 것과 다르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연히 느껴진다.
“옷으로 세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진희 디자이너는 강조해서 말했다. 세계… 나는 마음속으로 이 단어를 건드렸다 놓았다 반복했다. 너무 크다고 느껴져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거나 몰라주는 사람이 많았어요. 배우에게 옷을 가져다주고, 입혀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를 멋있게 만들어주는… 뭐 그런 일이요.” 음,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일이다. 작품 시나리오 나오면 그다음으로 섭외되는 사람이 의상 감독이다. 물론 배우보다 먼저다.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의 톤 앤 매너를 떠올리고, 감독님이랑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의상으로 작품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거죠.”
굳이 옛날 얘기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스타일리스트 혹은 코디가 하는 일과 의상 감독이 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한다. 개념이 다르다. 후자가 더 본질적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스타일리스트와 코디가 배우를 위해 존재한다면, 의상 감독은 작품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제가 떠들기 시작한 거죠.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의상이 관심을 받으면서 인터뷰 요청이 많았어요. 하지만 바빴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뒷광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구르미 그린 달빛> 때부터는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대부분 했어요. 제가 학교에서 무대 미술을 가르치거든요. 후배들이 일을 시작할 때는 여건이 잘 갖춰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책임감을 갖게 된 거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건이 갖춰지는 게 왜 중요할까? 일화를 몇 개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 <간신> 때는 연산군의 곤룡포를 실제보다 크게 제작했어요. 배우가 입고 무겁다고 하더라고요. 왕의 무게를 견뎌라, 가 의상의 콘셉트였어요.” 연산군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을 생각하면 그것은 적절해 보인다. 당시 연산군 역할을 맡은 배우 김강우는 옷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안시성> 때는 갑옷의 무게를 15kg에서 20kg 사이를 유지했어요. 가볍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리얼리티가 떨어질 것 같았어요. 배우 분들이 인터뷰 때 갑옷이 무거웠단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그녀가 어떤 태도와 어떤 의지로 의상을 제작하는지 느껴진다. 그녀는 웃으면서, 동시에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중국의 배우들은 시대극을 촬영할 때 갑옷 무게가 20kg 이하면 안 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함께 온 사진가가 나에게 벗어 둔 외투를 입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야 사진이 예쁘게 나올 것 같다고. 옷을 입는 마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 내 옷은 무게가, 없었다.
그녀는 <안시성>에 대해 더 이야기했다. 무엇인가 안타까워하면서. “예전에는 시대물이나 사극은 교수님 혹은 자문하는 분들이 옷을 디자인했어요. 고증을 기반으로 재현하는 방식이었죠. 반면 서양은 오래전부터 고증을 넘어, 영화적 상상력으로 세계를 만들었어요.”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안시성>은 삼국 시대 고구려의 이야기입니다.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아서 중국의 박물관까지 가서 찾아봐야 했어요.” 이 부분까지 듣고,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알아챘다. <안시성>은 에피소드, 전쟁 상황, 의상 등 여러 부분에서 고증이 문제가 되었다. 솔직히 나는 역사물의 경우 사실에 기초하되, 상상력을 더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어서, 저딴 걸로 딴지 걸 거면 다큐멘터리나 보라고 말하는 편이다. 이 옷은 고구려 시대의 옷을 정확하게 복원한 게 아니잖아, 따위의 말이 나는 어이없다. 뜬금없지만, 내가 그 사람들에게 따져 묻고 싶은 건 이거다. 너희가 고구려를 알아? 고분벽화를 보고 미루어 짐작하는 건가? 그 자체가 고구려를 대변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 대부분 벽화에는 상류층 혹은 그들의 수족인 일부 평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으로는 대다수 평민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추측하기 어렵다. 한국 복식 도감 류의 자료에 나와 있는 옷도 대부분 귀족과 그들의 하인이 입었던 옷이다. “짐작하건대, 평민들은 자료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거친 옷을 입었을 거예요.” 이진희가 말했다. “한 자료에서 이런 문장을 봤어요. ‘고구려 여인들이 산을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녔다.’ 여기서 느껴지는 옷의 정서를 떠올려보면, 벽화나 도감에 나와 있는 것과는 많이 달라요.” 그러나 이런 상상은 ‘고증’이라는 한 단어에 무너진다. 그녀에게 상상이란 이런 것이다.
“당시는 이동과 교류가 활발했어요. 백제의 검이 서아시아 끝에서 발견됐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의상을 제작할 때도, 예를 들어 갑옷이라고 한다면, 당시 서아시아 여러 나라의 갑옷 형태까지 염두에 두고 상상력을 확장해도 되는 게 아닐까… 요? 철갑 만이 아니라 판갑까지도 가능하다는 거죠.” 심장이 뛰었다. 이 말이 얼마나 개연성을 갖는지, 솔직히 내 지각으론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마법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 초반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배경으로 할 때는 사료에 충실한 의상을 선보인다. 이른바 고증을 충실히 (사실은 불완전하게!) 한 옷들! 국경 지대이자, 영화의 주요 배경인 안시성으로 이동하고 난 후에는 상상력을 더해 만든 옷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한 편의 영화에서 세계가 펼쳐진다. “소재는 그 시대에만 쓸 수 있는 것들을 사용했어요. 직조해서 만든 거친 소재 위주로요. 마, 삼베 같은 투박한 직물들. 변방의 느낌이 묻어 있는.” 내가 물었다. “전부 다 똑같은 옷을 입으면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하죠?” 멍청한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런 멍청한 질문을 왜 하게 만드는 거지? 관대해지면 좋겠다! 상상하는 사람을 혼내지 말고, 응원해주면 좋겠다. 지루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저 앞에 적었듯, 이진희의 작업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의도적으로 더 그렇게 했을 수도 있어요. 보여주고 싶어서… 옷이 인물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7월, 광주에서 열릴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폐막식 공연의 의상을 준비하고 있다. KBS에서 방영할 광복 100주년 드라마의 의상도 준비 중이다. 작년 10월에는 의류 브랜드 하무(HAMU_물의 춤이라는 뜻)를 론칭했다. “3년 동안은 소비자보다 저에게 집중하고 싶어요. 하무가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할지, 왜 필요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주고 싶어하는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다운 대답이다. 그녀는 서양 복식사를 공부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상징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한국의 전통 복식 안에 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적 여백, 편안함, 원형성과 같은 개념들은 마치 큰 그릇과도 같으니 어떤 걸 담아도 넘치지 않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적지 않고 숨겨둔 단어를 생각한다. 그녀는 옷이 ‘공간’이라고 말했다. 공간에는 무엇인가 담긴다. 무엇이 어떻게 담길까? 그녀가 하는 일, 그녀가 의상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 시간들, 형태들이 쌓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쉽게 말하는 것일 것이다. ‘공간’에도, 그녀가 강조하고 내가 설렜던 ‘세계’에도 방점은 ‘재현’이 아니라 ‘상상’에 있다. 보이지 않는 걸 만드는 것이다. 이건 큰 개념이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 그녀의 작업을 존중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믿기 때문이다. 가끔 이진희 같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1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