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이남은 미디어 아티스트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온전히 올바른 그 자체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다만 아직 이 시대에는 오지 않은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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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을 보고 지나쳤다. 외모로 판단하려고 한 건 아닌데, (아, 맞나?) 도시적으로 생겼을 줄 알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니까. 선입견이라기보단 상상이다. 그런데 그가 이이남이었다. 시골 마을 청년 대표 같았다. 나는 알아보았다는 듯 태연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이남이 이른바 ‘미디어’ 안에 넣고 있는 것들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고흐의 자화상, 모네와 겸재 정선의 풍경화, 세한도, 묵죽도 등과 같이 소위 ‘걸작’의 반열에 든 작품들이다. 첨단 모니터 안에 동서양의 걸작들을 넣고 해체시키는 것,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위트야 말로 이이남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남의 정체성을 남이 말하는 건 웃기지만. 아무튼 이이남의 외모에서 어떤 익숙함, 요즘 감각 같지 않은 표정을 읽는다면, 그건 그 나름 작품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음, 영 말이 안 되는 소리 같군.
이이남은 광주에 있다. 친한 큐레이터에게 “나 광주에 가. 작가 인터뷰를 하러” 라고 말했더니, 그는 대뜸 “이이남 선생님 만나러?”라고 물었다. “광주를 대표할 만큼 상징적인가?” 내가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KTX를 내려 택시를 타고 작업실로 갔다. 서재 겸 작업실 겸 회의실로 사용하는 공간에 들어갔다. 좌측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모나리자 폐허’와 ‘아사천에 매화꽃이 피었네’가 플레이되고 있었다. 잠깐 보면 회화고, 가만히 보면 영상이다. 나는 이 부분이 미디어 아트의 평범하지만 독특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엔 연속성, 시간, 그리고 어떤 사실을 비밀로 만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모나리자 얼굴 위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너무 많이 피어서 얼굴과 몸을 덮어 버린다. 꽃들은 마치 폭탄처럼 터지고 증폭된다. 헬기가 날아다니고 진짜 폭탄을 떨어뜨린다. “모나리자 표정을 자세히 보면 누군가를 깔보는 것 같잖아요. 그 위에 꽃과 폭탄을 등장시켜서 깔보는 것 자체를 다시 비웃어버리는 거죠. 일종의 비판일 수도 있어요.” 이이남이 말했다. “서구인들의 우월한 자의식에 어퍼컷을…” 어쩌고 저쩌고 화답(!)하다가 말을 멈추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근데요, 그런 설명은 지루해요, 그냥 이 작품은 재밌어요. 회화 속의 시간을 흐르게 하잖아요.” 이이남이 나를 보며, 그 약간은 귀엽고 순진한 소년 같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맞아요, 정확해요! 그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나는, 이이남의 위트에 대해 한 시간 넘게 떠들 자신이 있다. 이이남은 그림 속에서 정지된 박연폭포를 영상으로 플레이한다. 공중에서 땅으로 물이 쏟아지고 폭포 소리와 새 소리가 들린다. 이이남은 모나리자를 비만 여성으로 만들 수도 있다. 신윤복의 미인도에 나온 여성의 옷과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옷을 바꿔 입힐 수도 있다. 현실을 현실이 되게 하고, 어떤 전형성을 비난할 수도 있으며, 동양과 서양을 제 멋대로 교배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 안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이이남에게 불가능은 없다.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어요.” 그는 담양에서 태어났다. “멱감고 개구리 잡고. 재미있게 놀았죠. 그런 것들이 작품에 드러나요. 그게 저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되는 거예요.” 개구쟁이 소년이 지금까지도 작품 속에서 놀고 있을까? 소년은 경계가 없고, 소년은 신이 나고, 소년은 일관성이 없으며, 소년은 지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소년에게 ‘미디어’라는 장난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 작품 두 개를 여기 가져다 두신 건, 대표작이라고 생각해서인가요?” 내가 물었다. “봄이잖아요. 꽃을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마침 ‘아사천에 매화꽃이 피었네’ 안의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분홍색 꽃이 활짝 피었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시골의 소년은 어떻게 미디어아트를 하게 됐을까? “광주에서 대학을 나왔어요. 대학교 때 전공은 조소였어요. 당시에 학교에서 해외 유학 다녀온 분들을 교수님으로 모셨죠. 그중에 미디어아트를 배우고 오신 분이 있었어요. 그분에게 배운 거죠. 사람 한 명이 많은 걸 바꿉니다.” 훗날 그는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20년 동안. 시간이 더 흐르고 누군가 인터뷰를 하면서 ‘이이남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미디어아트를 하게 됐어요’라고 말하게 될까? 학생들에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가르쳤냐고 묻자, 그는 “작업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짧게 말했다.
“그런데 학생들 가르치는 건 그만두었어요. 조용히 제 시간을 갖고 싶어요. 작품을 궁리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가만히 걷거나 딴짓을 하더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작품을 더 할 수 있어요.” 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편으로 이어진 작업실 풍경을 보았다. 벽면에 여러 사진들, 스크랩한 기사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그것이 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 시간들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결국 작가를 작품으로 데려다주는 건 그 시간이라는 것도.
“그런데 작가님, 왜 서울로 오지 않으세요? 지역에 있으면 소외받는 기분이 들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시인들은 등단을 하면 대체로 서울에 온다. 결국, 무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위로받으려는 거지만. “여러 차례 좋은 제안이 있었지만 가지 않았어요. 지방에 있으면 아무래도 지방 작가가 되죠. 장단점이 있어요. 여긴 느리고 고요해요. 생각에 잠기기 좋고 집중하기에도 좋아요. 그래서 여기 남아 있어요.”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발음할 때마다 나는 새삼, 이곳은 광주이며, 이것이 광주의 언어가 흐르는 속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내 언어와 내 감정과 감각의 속도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TV 모니터 상자가 수십 아니 수백 개쯤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모니터 5대가 마치 병풍처럼 세로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그것은 가로로 넓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작은 비행기 한 대가 모니터 한 대를 지나 그 옆의 모니터로, 그리고 그 옆 옆의 모니터로 날아가더니 사라졌다. 하늘에서 폭탄이 내려오고, 불상이 마치 구름을 탄 듯 공중에 흘러갔다. 모니터와 모니터 사이의 경계는 없었다. 배경 작품은 겸재 정선의 ‘산수도’와 첨재 강세황의 ‘산수도’였지만, 어느 순간 ‘산수도’의 존재도 잊혔다.
자, 이쯤에서, 뜬금없지만, 퀴즈! TV 모니터, 동서양을 아우르는 이미지들의 낯선 조합, 이 단서만 놓고 볼 때 떠오르는 사람은?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창조했고, 이이남은 대중화시켰다. 그래서 물었다. “이이남에게 백남준은?” 짧게 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마르쉐 뒤샹 이후로 미술가들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백 선생님이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신 거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것이 브라운관이었고 우리는 지금 현대의 브라운관, 즉 모니터 앞에 있다. “백남준 선생님처럼 저도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에 기록될 작업을 하고 싶은데,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이남은 충분히 자신을 증명해온 작가다. 백남준이 살아 있었다면, 이이남의 작품을 봤다면, 아마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넓은 맥락에선 현대 작가들은 모두 뒤샹의 후예다. 백남준은 뒤샹을 극복했고, 이이남은 백남준의 후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긴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둘러 KTX를 탔다. 바쁜, 서울 사람이라서. 나는 많은 일을 하며 산다. 그런데 무슨,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개학을 앞둔 꼬마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숙제도 하지 않았고 일기도 쓰지 않았다. 뭔가 열심히, 아주 열심히 한 것 같았는데. 이이남의 모니터는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거나, 시간의 일부를 섞어 꼴라주한다. 서울로 가는 열차의 창 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열차가 구름을 앞지르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새가 툭 솟을 때, 마치 이이남의 모니터에서 플레이되는 풍경 같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 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렇게. 아직 소년인 이이남은 광주에 있다. 고유하고 고요한 그 자신의 속도로. 내 몸이 어두워졌다. 밤이 된 것일까?
2019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