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주다. 성 밖에서 왕자가 용이랑 싸우고 있는데 아무래도 왕자가 질 것 같다. 이번에도 성을 탈출하기는 틀린걸까. 최근에는 용감한 왕자들이 멸종위기라 이번 왕자도 싸움에서 지면 나는 또 기약없이 용감한 왕자를 기다려야 하는걸까.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되고, 왕자들이 용이랑 싸우러 오지 않고 어디서 뭘 하나 성 안에 있는 망원경으로 봤다. 그랬더니 ‘소확행’이다, ‘욜로’다 해서 자기 갈길 가고 있다. 에잇! 이럴줄 알았으면 성안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 따위 하지 말걸 그랬다.
대중적으로 ‘공주’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디즈니는 수동적인 공주의 모습에서 다소 벗어난, 호기심이 많고 주도성이 살아있는 공주들을 그린다. 그 ‘공주들’과 함께 나의 유년기 여성성도 함께 자라왔던 것 같다. 여자 아이들이 공주를 좋아하고 열광할 무렵, 엄마들 대부분은 ‘저것도 한때다.’, ‘저러다 말겠지.’하고 생각한다. 엄마도 내게 그랬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비교적 ‘덕후’가 아니었기에 공주 옷으로 나를 치장한다든지 굿즈를 모은다든지 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대신 나는 책을 읽었다. 난 그들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공주들이 살고 있는 모든 세계를 탈탈 털어서 채로 걸러내고 보면 내게 남는 것은 ‘육신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지구에 있는 여자들의 절반정도는 아마도 나와 같이 ‘공주’를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고, ‘관계’에 대한 편견을 갖고, ‘인생’에 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공주’로 시작된 우리들의 세계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한,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불순종의 자아가 그 토양위에 뿌리를 내리고 나를 잠식해왔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책을 보며) “엄마, 이 공주는 못생겼어요. 이 공주는 예뻐요.” “ㅇㅇ야, 진짜 아름다운 공주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주야.”
(서점에서) “엄마, 공주 책 사주세요.” “이 공주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공주들이라서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공주들이니까 그럼 안살래요.”
(안아주며) “우리 ㅇㅇ얼굴은 어쩌면 이렇게도 빛날까? 우리 ㅇㅇ가 기도할때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 가져다 드리기 위해서 천사가 금그릇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는데, 그때마다 천사의 날개에서 반짝이가 떨어져서 ㅇㅇ얼굴이 이렇게 빛나는거야.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때마다 얼굴이 더욱 빛나게 돼. 하나님 나라의 공주는 그래서 반짝거릴 수밖에 없어.” “엄마 얼굴도 빛나요.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서른 여덟이 되어서야 알았다.
용과 싸워서 나를 구하러 올 수 있는 완벽한 왕자는 바로 우리들의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남편도, 나도, 딸도, 우리 부모님도 모두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