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교육칼럼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열살 무렵부터 어린 딸의 머리를 빗겨주는 상상을 즐겨하곤 했다.
동그란 머리 방울이 빨간색이었던 것까지 기억 날만큼 생생한 기억. 딸의 엄마가 되는 마음의 준비를 꽤 오래전부터 시작한 셈이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아기를 정말로 태중에 품게 되었을 때, 임신 사실을 알았던 순간에 남편과 나는 함께 무릎을 꿇었다. 마주 앉아서 자녀를 위한 첫번째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아이를 구별된 아이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나실인으로 기를 힘을 주소서.” 그러나 감격도 잠시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입덧은 난생 처음 당하는 극한의 고통이었다. 물도 목으로 넘길 수 없는 상태로 후대를 위한 우아한 기도와 묵상은 불가능했다. 육체에 있는 기운이 모두 빠져나갔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연약한 시절에 남편은 복음 태교에 정성을 쏟아주었고 하루에도 여러 번 <주님은 나의 최고봉>과 <아내/태아를 위한 무릎 기도문>을 읽어 주었다.
성경책을 읽어주고 찬양을 불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일 밤 태중의 아기를 축복하는 기도도 해주었다. 스승이신 장인성 목사님께서 기도 속에서 주신 ‘태속에서부터 성령 충만한 아이’라는 메시지를 우리 부부는 언약으로 붙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보통 ‘결혼 준비’라고 하면 ‘결혼에 필요한 소비’를 추려 나가는 것을 떠올리듯이, 출산 준비도 소비에 거의 대부분의 관점이 집중되어 있는게 현실이다. 그런 시대의 흐름을 따라 베이비페어는 대규모로 열리곤 했고 각종 출산 용품의 매력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출산 용품을 야무지게 준비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아기를 키우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것은 칭찬받아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에게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관심의 에너지는 무한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하면, 출산용품을 준비하는 것 외에 영적 준비와 육아의 뚜렷한 방향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질세계에 대한 과잉된 관심은 곧장 소비에 대한 집착으로 번져가고 결국은 소비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모한다. 그렇게 되면 목사님들께서 말씀하시는 “돈이 없으면 안쓰면 된다.”는 이야기가 헛헛하게 들릴 뿐이다. 실제로 많은 부부가 ‘자유롭게 소비’하기 위한 돈벌이에 나서고 발등에 뜨거운 불덩어리가 떨어진 사람들처럼 현실이라는 올무에 걸려들고 만다.
그래서 정작 ‘자녀교육’을 심각하게 고민하는데에는 시간도, 경제도 쓰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될 청년들과 복음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우리가 해야할 영적 전쟁이다. 생각해보자. 사단은 우리 앞서 우리의 아이들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아니, 그 준비를 이미 모두 마쳤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도 알고 있으며 우리 약점을 공략하는데에도 능하다.
나는 사단이 가진 이 모든 전략을 내 인생을 통해서 경험했다. 사단은 먼저 나에게 불신앙을 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세계관’이다. 태어나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 견고히 자라나는 동안, 나는 불신앙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 학문을 배웠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떠난 나의 죄성은 그 모든 흑암의 메시지를 잘 흡수했다. 열 다섯 살에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우리의 전 인격적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 하나님이 믿고 싶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나의 삶은 끊임없는 불신앙에서 갈등하는 시간을 고비마다 가져야했다.
우리는 자녀교육에 대한 첫번째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나의 자녀를 교육하는 주최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자녀교육에 관해서 ‘학교에 맡기면 저절로 잘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부모를 만나면 너무 안타깝다. 장담하건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그것이 주일학교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각종 수련회와 훈련, 청소년 전도 신학원 등을 다녔던 또래 렘넌트들의 다수가 지금은 신앙조차 갖고 있지 않은 현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부모는 자녀의 복음 교육에 대한 기도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아이를 교육하는 부모로 성장해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부모가 교육의 주최로서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왜냐면 그것은 부모로서 너무나 고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가 되기로 결단한 순간, 결코 숨길 수 없는 연약함이 발가벗겨지는 고통을 맛보게 되며 교육의 절대 불변의 진리인 “삶으로 가르친다”는 원리가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되는 교육자가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허물 많은 한 인간으로서 죄로 물든 자신을 탓하며 몸부림치는 눈물의 기도. 그것이 바로 시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을 맡아 관리하는 생명 청지기로서 주님의 멍에를 매고 그 길을 가야 한다. 정작 주님의 멍에를 매는 순간, 99퍼센트의 사람들이 걷는 길이 결코 안전한 길이 아님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