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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Jan 12. 2020

방향 잃은 바스키아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한 겨울 뉴욕에서, 돈 없이 그 분위기를 향유할 곳은 많지 않다. 감사하게도 삼촌댁에 머물 수 있게 되어 뉴욕을 꽤나 길게 느낄 기회가 주어졌지만, 돈이 없으니 매번 맨해튼에 나가는 것도 꽤나 고역이 되어 버렸다. 과분한 호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 가지 위로가 될만한 것이 있었다. 높은 빌딩들로 가득한 맨해튼에서 내 숨통 그리고 내 공간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틔워준 미술관 말이다.


    여행 291일 차, 2018년 2월 2일

    뉴욕 국립 미술관에 갔다. 금요일 4시부터 무료입장이라 미술관 앞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푸드 트럭 할랄 가이즈에서 할랄 음식을 먹으면서 줄 서기를 기다렸다. 오후 3시쯤이 되니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해서 나도 그 뒤를 이었다. 꽤나 추웠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버티다가, 정각에 맞춰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밑에서부터 작품을 볼 것 같아 맨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5층부터 보려고 했는데 잘못 길을 들어 4층 현대미술 쪽부터 보게 되었다. 역시 현대미술이라 그런지 굉장히 자유분방한 작품들이 많았다. 무슨 의미일지 전혀 이해도 할 수 없는,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리면 되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5층은 사람들이 훨씬 바글바글 했다. 이곳은 인상주의관으로 반 고흐, 피카소부터 모네, 마티스, 칸딘스키까지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들을 따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예전에 교과서에서 보았던 기억이 가뭇하게 있기도 하고 여행을 하며 방문한 여러 미술관에서 눈동냥을 해서 나름 익숙했다. 사진을 벗어나 회화의 새로운 해체들을 시도한 이 시기의 그림들은 재미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작품들을 구경하다 보니 작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도 눈길이 갔다. 저 사람들은 저 작품들을 보며, 때로는 따라 그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그림은 저들의 삶에 어떤 자양분으로 자리 잡을까. 작품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매일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와 다른 영감을 받고 갈 테니까 말이다.


  문득 따뜻했다. 이 추운 2월의 뉴욕에서 미술관이 없었으면 나는 이런 쓸데없는 망상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여행 300일 차, 2018년 2월 11일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삼촌댁 근처 카페에서 라테 한 잔을 시켜 놓고 인상주의 작가들을 검색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몸이 편해졌는지 다시 우울한 감정들이 올라온다. 채팅방에서 친구들에게 평소에 죄책감을 많이 느끼냐고 물어봤다. 들어보니 그들은 그렇게 많이 느끼진 않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나의 어두운 면 받아줄 그릇이 좀 모자란 것 같다. 


    여행 302일 차, 2018년 2월 13일

    우울한 감정을 털고자 오늘은 큰 마음먹고 근교로 나가기로 했다. 바로 이터널 선샤인의 촬영지였던 몬탁.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시간이 조금 촉박할 것 같아 힘껏 뛰어 펜 역에 도착했다. 무사히 기차에 잘 타고 표 검사까지 받았다. 승무원은 바빌론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며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들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처음으로 만났던 기차가 바로 이 길 위 었다니, 괜히 설렜다. 그 설렘을 안고 잠깐 잠이 들었다 깨니 바빌론 역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몬탁행 기차를 찾았다. 그런데 플랫폼에 몬탁행 열차에 대한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직원에게 가서 몬탁행 열차를 물어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 방향은 아까 내가 내렸던 바로 그 플랫폼이었다.


  다시 부리나케 뛰었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문이 닫힌 채 출발을 해버렸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가도 되는 기차를 굳이 뛰어나와서 헛짓을 해버렸다. 아까 승무원이 나에게 정확히 무엇이라고 했는지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기차는 3시간 후였고 그 기차를 타면 정말 밤늦게 오는 기차밖에 없었다. 화가 났지만, 오히려 너무 허탈해서 웃음이 더 먼저 나왔다. 몬탁은 그냥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걸로 하고, 티켓을 환불해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레 일정이 여유로워졌다. 몬탁만큼의 영감을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며칠 전에 갔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시 가기로 했다. 워낙 큰 미술관이라 못 본 것들이 많았다. 저번에 보지 못하 현대미술관 쪽을 구경했다. 이곳에는 샤갈 작품까지 조금 더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인상주의 관 옆에는 특별전으로 데이비드 호크니 전이 열리고 있었다. 현대적인 야수파 같은 느낌이랄까. 미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밝은 파란색을 다른 원색들과 굉장히 조화롭게 사용한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한참 관람하다가 배가 고파 미술관 앞 푸트 트럭의 5달러짜리 할랄 음식을 사서 공원에 앉았다. 날씨가 조금은 풀려서 더욱 여유롭게 할랄 음식을 해치웠다. 몬탁행으로 향하는 길을 잃었어도, 미술관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여행 303일 차, 2018년 2월 14일

    오늘 밤에 뉴욕을 떠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브루클린 미술관에 가서 쟝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기로 했다. 쟝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는 것은 나에게 꽤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역을 하고 첫 학기에 들었던 유럽 건축 기행이라는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은 문득 이런 과제를 나에게 내주었다. 


 "자신만이 좋아하는 여행의 테마를 짜 보세요. 남들이 좋다고 해서 가보는 그런 여행 말고요. 아마 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주 내 것이라고 착각하거든요."


   나만의 여행이라, 그때 처음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나만의 테마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낸 어떤 테마든 간에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실 온전히 나 자체에서 나온 주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남의 시선을 안 쓰던 어린 시절로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낙서'였다. 내가 그저 그 존재 자체로 재미를 느꼈던 것은 바로, 그냥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손을 움직이며 그렸던 방향 없는 낙서들, 그것이야말로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낙서를 따라 여행을 해보자.'


  나는 그 과제의 주제를 그렇게 정하고, 낙서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나왔던 이야기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장 미셸 바스키아의 이야기였다.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만의 낙서로 예술의 반열에 오른 천재였다. 어떠한 방향을 따른다기보다 자신이 그리는 행위 자체로 그 가치를 보여준 그의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가 낙서를 그리던 이곳, 브루클린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붉은 갈색 벽돌과 회색의 시멘트로 이루어진 건물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브루클린에서, 마치 옛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는 심정으로 바스키아의 흔적을 따라갔다.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다른 전시들을 다 제치고 곧바로 바스키아 관에 들어갔다. 다양한 그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읽고 작품을 보러 들어갔는데 웬걸, 그가 그린 작품이 달랑 하나뿐이었다. 시간도 없는데 오히려 잘 된 일인 걸까. 나는 한 작품 앞에 서서 1시간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최대한 그를 느껴보았다. 


  접신한 듯 뭔가를 강렬하게 느낀 것은 아니지만 낙서, 나만의 낙서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토리가 될 수 있었다. 한 교수의 질문이 돌고 돌아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처럼 말이다.




바스키아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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