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미 Jan 19. 2020

수직의 삶, 수평의 삶 1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에콰도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최소 2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보내니, 몸의 내구도가 닳는 기분이었다. 소닉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가 물속에 들어가면 HP가 1씩 닳는 그런 기분이랄까. 게다가 쿠엥카에서 장염까지 크게 걸리는 바람에 그 타격은 더했다. 그렇다고 남미에 와서 고산 지대를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에콰도르를 벗어나더라도, 페루의 대표 고산 여행지인 와라즈, 쿠스코 등이 있었다. 하지만, 맥주를 마시고 싶기도 했다. 그러기 위에선 피곤하더라도 중간중간 바다로 가야 했다. 엎질러진 물처럼 엎어질 시간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페루에서는 더욱 열심히 산과 바다를 오르내렸다. 더 오래 수영하기 위해, 열심히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드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 343일 차, 2018년 3월 26일

   내일이면 트루히요를 떠난다. 고산지대 와라즈까지 한 번에 가기가 부담스러워 중간 휴식 지점으로 들른, 바다 근처 마을 트루히요에서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해발 0미터에 가까운 이곳에서, 언제나처럼 혼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엎어져 있을 생각으로 말이다. 여느 때처럼 가성비 좋은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내 공간 하나를 빌렸다. 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누군가와 같이 쓰는 방이더라도 침대 위에서의 나만의 익명성을 향유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오히려 혼자 방을 쓰는 것보다 더 아늑하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밤을 새워서 도착한 첫날, 악취가 나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잠깐 누워서 쉬려고 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냄새를 제거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도 깨끗해져 볼까 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는데 엄지 두 개만 한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쳤다. 쥐인 줄 알았다. 섬찟했다. 내 공간을 모두 잃은 기분이었다. 이 마을에선 이만한 가성비의 숙소가 없는데 큰일이었다.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일단은 나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냄새와 바퀴벌레에 밀려나 동네를 정처 없이 걸었다. 바다 앞에서는 방랑하는 게 쉽다. 걸음을 어렵게 만드는 높은 경사도 없고, 길을 잃더라도 일단 어느 한쪽은 바다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방랑을 하다가 한 친구를 만났다. 그것도 숙소 바로 옆 블록의 사는 친구를 말이다. 며칠 간이지만 동네 친구를 만났다며 좋아하는 그는 나에게 자신의 시간과 공간 일부를 내주었다.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그와 함께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하고, 그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서로 서투르게 소통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서로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나 혼자만의 공간을 누리기는 어려웠지만 처음 만난 동네 친구의 포용과 안내로 광장에서, 골목에서 그리고 카페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간을 누렸다. 동네 친구와의 시간은 내가 마치 이곳에 정착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나는 떠돌게 되지만 말이다. 잠시 머무르는 자에겐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는 이 안정이라는 감정은 나 자신을 약하게 만들고는 한다. 나도 몰랐던, 어쩌면 외면했던 나의 빈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감으로써, 나는 나 자신이 때로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방랑할 땐 정착이 무섭고, 정착을 할 땐 다시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오늘 또한 떠나는 것이 두렵다. 그렇다고 이곳에 눌러앉을 것도 아니면서 나는 희한한 변덕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짧게나마 내 빈 공간을 보살펴준 그 친구가 고맙다. 그리고 벌써 그립다. 눈물을 뒤로하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본다. 다시 나는 길가에 놓인다. 짧은 정착 덕분에 나는 내 빈자리를 깨닫고 채워보는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사실 많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다. 그냥 부서지는 파도처럼 울었다가 잠에 들면 된다. 그리고 다시 개운하게 일어나서 추억을 안고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여행 347일 차, 2018년 3월 30일

   오늘은 와라즈 근처에 있는 해발 4600여 미터의 69 호수에 가는 날이다. 남미에서 종종 동행을 한 효진 형과 함께 투어 차에 올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싫다. 정신을 차릴 새 없이 긴장을 해야 하는 그 기분은 정말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고산으로 향하는 벤을 왕복 6시간 타야 했기에 더 불안했다. 오늘은 그저께 파라마운트 투어 때보다 산행 시간이 더 길다고 해서, 초콜릿을 더 넉넉히 사놨다. 가방 가득 들은 초콜릿이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드디어 산행길 입구에 내려 69 호수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확실히 이제 고산도 적응이 돼서 에콰도르 코토팍시 때의 공포에 비하면 한결 여유로워졌다. 


  물론 내 마음만 여유로워졌을 뿐 산행 루트는 훨씬 길었다. 고산을 버티며 자라난 강한 풀과 나무들을 보며 나름 그 운치를 즐기며 걷고자 했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 69 호수에 멘털이 종종 흔들렸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부활절 휴가 시즌이라 이곳에 온 페루 사람들도 많아 그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며 환기를 시킬 수 있었다. 수많은 페루 사람들 속에서 동양인 두 명은 확실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들 이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화를 길게 잇지는 않았다. 페루 사람들은 고산에 끄떡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그냥 편견이었나 보다.


  중간 호수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또다시 1시간에 걸쳐 도착한 69 호수. 장엄한 암석 아래 넓고 푸르게 펼쳐진 호수가 내 마음을 녹였다. 입술도 저리고 머리도 조금 어지럽지만, 신나는 마음이 더 앞서 이곳저곳에서 사진도 찍고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조금 더 조용히 이 장관을 즐기고 싶어 불편을 감수하고 돌들을 밟아 옆으로 더 들어갔다. 동행 효진 형은 감동이 엄청났는지 이 호수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고산이라 날도 춥고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하는데 여기서 수영이라니.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빙하 물에서 수영을 하는 형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장관을 느꼈다.


  분명 멋있고 고생을 해서 올라온 만큼의 짜릿함은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빨리 숙소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경치 감상을 충분히 마치고 하산을 준비했다. 내리막길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온 길을 내려가는데 웬걸, 출발지가 생각보다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내리막길이라 먹을 것도 다 먹어치웠는데, 걸어도 걸어도 길 중간이었다. 허기가 졌다. 심지어 물 조차 없어서 더 어지러웠다. 동행 형도 먼저 내려가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마음으로 하산을 하게 된 것이다. 고산 증세에 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분은 너무 괴로웠는지 빨리 내려가고 싶어 뛰다가 토하기를 반복했다. 오를 때도 볼 수 없었던 광경들을 산을 내려가면서 보게 되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로 비까지 내렸다. 정말 희미한 정신의 끈을 잡고 겨우 출발지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작은 노점에서 쿠키 몇 개랑 이온음료를 사 홀린 듯 까먹었다. 너무 힘들어 욕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 벤을 타고 숙소까지 3시간을 더 내려가야 했다. 막상 내려오니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두통에 머리를 붙잡고 멀미약, 고산 약을 허겁지겁 복용했다. 벤에 탄 후 조금만 참자는 생각으로 눈을 감은 채 인내에 인내를 더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나 싶었다. 고산지대에 오르게 되면 조금씩 느끼는 감정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고산에 오르며 이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내가 바랐던 혹은 꿈꾸었던 것을 느끼는 건 한 순간이다. 그것을 이루고 나서는 '그래서, 이제 뭐 어쩌라고?'라는 허무한 물음이 자연스레 올라온다. 어쩌길 뭘 어째, 내려가야지. 그럼에도 왜 많은 사람들은 산에 오르 듯 어딘가에 오르는 수직의 삶을 살려고 할까? 바닷가 앞 파라솔에 편히 누워 맥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면서도, 지금 당장은 땀을 흘리며 각자만의 정상을 향해 나아갈까? 모르겠다. 맹목적으로 그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마 정상뿐만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무언가의 재미를 느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 재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정상을 오르게 되었을 때 전자의 이유로 오르지는 않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방향 잃은 바스키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