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게 인사하기
여행을 다닐 때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나라 문화가 개방적이었던 것도 있지만 이방인으로서 인사는 생존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줄 사람이 나밖에 없는 낯선 곳에서 조금이라도 내 편을 만드는 작업이랄까. 물론 머리로 그런 걸 계산하면서 다녔던 것은 아니고, 작은 몸뚱이에 무거운 배낭 두 개를 메고 다니는 이방인의 본능적인 적응력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귀국 후에는 어떤 연유가 있지 않은 이상 모르는 이에게 인사를 건넬 일은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물론 내 인생을 여행하고 있는 이방인이라고 스스로 마음 먹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를 이방인으로 볼 리는 없었다.
사실 정착하며 살고 지내고 있음에도 한 반절 정도는 그냥 이방인으로 지내고 싶었다. 아직 내 자체로 새로움을 찾아내지 못해서일까 완전한 정착은 왠지 모르게 조금 답답해보였다. 물론 완전한 정착이라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또 내가 지금 정착을 하긴 한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1년 간의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전철로 들어설 때였다. 침묵만이 고요히 흐르는 열차 안 흑백의 공기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게 꼭 대한민국 서울의 전철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익숙하디 익숙한 내 동네로의 복귀. 스스로 새롭지 않으면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막막함이 마음을 무겁게 한 것 같다. (물론 뉴욕 지하철에 비하면 정말 정말 조용하다.)
서울살이를 다시 시작하며 전보다는 전철이 조금 더 시끄럽게 느껴질 때쯤이었을까? 서울에 놀러와서 들떠 있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보면 부러웠다. 부럽다기 보다는 궁금했다. 저 이방인들에게 이곳 전철은 모습부터 냄새까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서울의 2호선을 저들이 느끼는 만큼 편견없이 느끼진 못할 것 같았다. 언어를 까먹을 수도 없고 후각이 다시 리셋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문득 외국 여행자에게 인사를 건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으로서의 기운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싶어서였달까? 이방인은 못되어도 반이방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이방인으로서의 첫 다짐을 위해 친구들과 대한민국의 상징 경복궁으로 갔다. 여행도 오래 했겠다 먼저 당당하게 인사를 해보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멀리 한복을 입은 외국인 무리가 오고 있었다. 10미터, 5미터, 1미터. 그들을 마주보고 인사 하려니 갑자기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그들을 지나쳤다.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내 행동을 막았다. 실재하지도 않는 머릿 속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움츠리게 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돌러보았다. 이번에는 외국인 청년 한 명이 궁 내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저 인사일 뿐이다. 인사일 뿐이다'라고 되뇌며 그에게 다가갔다.
마음을 가다듬고 "Hello?"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장 "How are you?"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자연스러운 대화라고 했지만 중학교 교과서 다이얼로그에 나올법한 기본적인 회화였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을까. 간단한 대화를 마치며 반이방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막상 해내고 나니 개운했다. 짧은 대화 후 작별 인사를 끝으로 멀어지는 그를 보며,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 많은 것들과 더 친해질 수 있길 바랐다. 그 과정에서 새롭고 진한 영감들을 얻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나에게 향하는 바람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