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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21. 2021

죽음에 대해서

유언 쓰고 낭독하기

 어렸을 적 처음으로 키우던 강아지가 죽는 것을 보고 죽음을 접했다. 물론 그때는 죽음이 나에게도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연유도 모르게 나의 죽음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의식이 어두 껌껌해지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모든 것이 결국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게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진지하게 삶의 끝을 생각하면 그저 아득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언젠가 끝은 있고 그것을 피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막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담담하게 죽음을 대면해보고 그를 통해 지금의 삶을 다시 한번 정비해보기로 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쌀쌀한 가을밤, 서소문 쪽 스타벅스에 들어가 유언을 썼다. 이렇게 먼저 죽음에 접근하여 글을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햇수로 27년의 삶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분히 펜으로 옮겼다. 나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스쳐간 많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묵직하게 종이 한 장을 다 채우고 유언을 읽을만한 곳을 찾아 밖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덕수궁 뒤 정동교회에서 읽어볼까 했는데 너무 어두워 조금 더 안쪽에 있는 정동극장으로 갔다. 극장 앞 공간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어, 글을 읽기에 아주 적합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20대 중턱에서의 첫 유언을 읽어보기로 했다. 썼던 글을 입에 담으려니 평면 속 글자들이 생생하게 살아 나올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벤치 뒤로는 불긋불긋한 단풍나무들이 진한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나를 스쳐간 사람들아! 다들 안녕하냐?" 급작스러운 반말로 유언을 읽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존대는 없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사실은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을 수도 있거든." 인사 다음에는 고백이었다. "그래도 그 '보다'라는 사이에 나만의 또 다른 행복이 있었다. 봐줘라!" 그리고 그 고백은 또 애교가 조금 섞인 자기변명으로 이어졌다. 다소 건방진 유언일 수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나를 좋게 바라봐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끝으로는 세계여행을 떠났을 때의 마음으로, 나의 이전 삶에게 안녕을 고했다. 더 이상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없고, 시원한 바람이 다리를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없음에 아득함을 느끼고, 사막에서 모터바이크를 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비를 맞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다. 비록 위대한 사람은 되지 못했어도 꿈틀거리며 행복을 느끼려 하는 사람은 되었기에 후회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작은 몸을 부풀리며 산 나 자신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색한 마음을 누르고 나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썩 편치는 않았다. 확실히 쓰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묘하게 다른 차이가 있다. 마음으로부터 나가는 것과 그것이 다시 마음으로 들어와 새겨지는 것의 차이랄까. 그럼에도 이번 기회에 직접 죽음 앞 마음을 읊조리니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대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쓰다듬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달까. 물론 아직 죽을 생각은 없기에 내 유언은 앞으로도 계속 달라질 것이다. 물론 쓸 생각을 하기 전에 죽음이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지.


 그러기 전에 자주 유언을 써봐야겠다. 30, 40대 때의 유언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니까. 쓸 때마다의 감정도 그때그때 달라지겠지. 그러고 보니 유언 한 장으로 지금 나는 새로운 상상을 하고 있다. 죽음이 왜 최고의 발명품일까. 그러고 보면 죽음은 언제나 산 자들에게 물음표다.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정답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만의 새로운 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보통 죽음에 대해 무의미한 소멸을 떠올리지만, 그래서 제각기 의미 있는 창조를 찾는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모두 발명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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