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되지 못한 과거로부터

서울책보고에서(서울 편)

by 이마루
과거는 늘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가 직접 살아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밀린 이자를 받으려는 것처럼.
살아가는 책(이은혜), 46p

겨울이 다시 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우려스러웠던 비는 그치고 마침내 봄이 되었다.


요 며칠 컨디션이 좀 안 좋았다. 외부활동은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쉬는 게 좋다는 충고는 들었으나.. 커튼 사이를 비집고 아침부터 내 몸을 슬쩍 접촉해 오는 이 귀여운 햇살을 모르는 척하자니 그것 또한 나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죄악인 것만 같아 외출을 결심했다(?). 어쩌면 내가 앓은 그 몸살은 햇볕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르니까.

한강을 걸었다. 오늘은 강변 따라 서울책보고까지 걸어가 보는 게 목표다.

잔디 위로 돗자리를 펼치고 진한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공터에서 연을 날리는 아이와 아버지, 운동장에서 야구를 즐기는 학생들, 봄이 생명을 갖게 된다면 아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다. 그러니 나는 산책을 하면서 이미 봄을 보고 있는 셈. 한쪽으로 "지나갈게요!"라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면 때는 이미 늦었다. 자전거를 탄 그들은 쌩하고 내 위치를 이미 저만치 벗어나 있다.

비가 내린 탓에 후두둑 떨어져 버린 꽃잎이 찰나이지만 마음을 아프게 한다. 슬픈 것은 아니다. 이 아픔은 어쩔 수 없이 지나가버린 나의 어떤 것, 아마도 시간에 대한 것일 것이다.

월요일(정기휴관) / 화~목(10:00~19:00) / 금, 토(10:00~20:00) / 일, 공휴일(10:00~18:00)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자기 기억에 붙들려 과거를 되새김질하기 쉬운데, 여럿이 떠나도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주로 시간 여행을 하듯 지난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이 되지 못한 과거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쉽사리 삶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책(이은혜), 118p

서울책보고는 2019년 3월 27일, 13만 권의 책을 보유한 헌책방으로 처음 개관했다. 그리고 2025년 겨울에는 큐레이션 서가라는 주제로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재개관을 했다. 내가 처음 서울책보고에 가본 것은 2019년 서울시 공무원 시험을 막 치른 후 최종 면접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때는 면접스터디에 따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따릉이를 타고 서울시 곳곳을 누볐다. 정책에 대해 무엇을 물어볼지 모르니 뭐라도 보이면 기억해 두고 알아두자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개관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던 서울책보고에도 가본 것이다. 커다란 창고형 건물 안으로 아치형 서가에 헌책이 빼곡했다. 그 사이를 거닐며 보물 같은 책 한 권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신중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흐른 시간이 벌써..7년이란 말인가? 시간이라는 건 때로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나간다. 정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찾은 서울책보고는 더 말끔하게 단장한 분위기였다. 큐레이션 서가로 단장했다고 하는데, 이건 큐레이터로 선정된 인사들이 추천한 책으로 서가를 꾸며놓은 것을 말한다. 올해의 큐레이터는 민음사 편집자 김민경 님,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 브랜드 마케터 손하빈 님, 건축가 유현준 님, 사진작가 이훤 님이었다. 그들의 서가를 보면서 끌리는 책 두 권을 집어왔다. 어쩌다 보니 두 권 모두 김민경 님의 서가에 있던 책이었다.

잃는 것의 미덕은 잃어서 새 땅에 뿌리내릴 수 있고, 형질 전환을 일으켜 이전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되며, 길 잃었던 장소를 온전히 소유할 때 발휘된다. 때로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잘못 들어섰다면 계속해서 발을 놀려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장소성을 의미해 내가 있는 이곳의 바깥을 탐험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처음 만난 타인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심신을 걸쳐볼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잃는 것은 '과거의 나'다. 길을 잃으면 나를 잃고(그런 두려운 처벌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얻는다. 길을 잃으면 들어갔던 입구로 도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구로 빠져나오게 된다.
살아가는 책(이은혜), 136-138p

서가 오른편에 독서 아이템도 진열되어 있어서 브랜드 별로 볼거리가 많았다. 정작 그 안에서 독서를 한 것도 아닌데, 한 바퀴를 둘러보는 데만도 시간이 늘어진 치즈 가락처럼 길게 지나갔다. 이곳에서는 미니 연필과 연필캡을 골랐다. 문진도 집었다 놓았다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오늘로써 나의 7년이라는 시간이 이 장소에 고여버렸다. 두 번째로 찾아오고 나니 알겠다. 지나간 시간이랄까, 잃어버린 시간이랄까. 한 장소를 다시 찾는 일은, 때로는 나 자신을 직시하도록 기억을 되살리는 잔인한 시간이 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모두를 생각하게 한달까.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 변화의 정도라면, 이 책방이 헌책방에서 큐레이션 서가로 탈바꿈한 만큼은 되는 것 같다. '지금이 되지 못한 과거는 실체가 없는 것'임이 분명한데도 나는 도대체 어떤 미래와 가능성이 그토록 궁금하고 그리웠던 걸까.

소용없는 망상에 빠져 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시간은 저녁 7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아치형 서가가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넘어가 도서관처럼 꾸며 놓은 공간을 둘러봤다. 소설, 에세이, 만화, 사회문화, 서울 관련 도서 등 분야별로 정리된 서가가 펼쳐졌다.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 자리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독서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저마다의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빈백의자가 놓여 있고 몇몇이 누워서 책을 읽는다. 그야말로 서울 야외도서관의 실내 버전이다.

다음에 읽을 책은 당신이 현재 읽고 있는 책에 암시되어 있다.
살아가는 책(이은혜), 77p

다음에 읽을 책도 이곳에서 미리 정하고 간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이라는 책, 아니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둘 중 하나다. 뭐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책을 선택하는 건 몇 안 되는 나의 커다란 자유다. 그런 자유를 주는 서점이니 내가 발길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이은혜 작가님이 <살아가는 책>에서 한 말을 조금만 비틀어 보자면, 다음에 읽을 책은 현재 내가 있는 이 '책방'에 언제나 암시되어 있다.

2019년 헌책방이었을 때의 서울책보고
서울책보고에서 구매한 것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