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숲속도서관에서(서울 편)
도서관은 나에게 제2의 집과 같은 곳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오히려 도서관이 진짜 우리 집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해변의 카프카(상) 66p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자리를 양보하며 내게 도움이 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도서관 가는 길이 조금은 편해졌다는 데에 있다. 날씨라도 따뜻해지니 걸음이 가벼워졌다. 대출 최대 권수를 채워 대여하는 사람은 반납하러 오는 길이 늘 무겁다.
지난겨울, 눈길을 저벅저벅 걸어 도착한 숲속도서관의 풍경은 봄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 중 하나다. 그날은 반납하기 직전까지 책을 붙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인도 위를 조심조심 걸었다. 한 장이라도 더 읽을 수 있을까 해서 책을 바라보자니 땅에 태양이라도 박힌 듯, 눈 위로 반사되는 햇살의 눈부심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읽던 책은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 밑으로 전해오는 쌓인 눈의 감각에 집중했다. 오솔길처럼 난 좁은 길을 몇 그루의 나무를 뒤로하며 걸었다. 마침내 숲속도서관이 보였다.
강동숲속도서관은 2025년 5월 14일에 개관했다. 개관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외관이 깔끔하고 시설도 깨끗하다. 진열된 책 역시 낡은 느낌이 없다. 위치로는 명일근린공원 내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라, 이름도 그래서 숲속도서관이다. '자연 속의 도서관'을 지향하는 취지에 걸맞게 사방이 푸릇하다.
나는 1층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타고 곧장 2층으로 향한다. 그러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나온다. 탁 트인 공간 속 넓고 큰 과학자의 서재 구역이다. 한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나무를 보고 흙을 느낀다. 사방으로 문학의 공기가 흐르는 이곳은 사실 과학 특화 도서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서가도 '과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서재'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이 작은 방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장소임을 깨닫는다. 나는 바로 이런, 세계의 움푹 파인 데와 같은 은밀한 장소를 찾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건 가공의 비밀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장소가 정말로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니, 바로 눈앞에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자, 그것은 다정스러운 구름처럼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멋진 감각이다. 나는 크림색 커버가 씌워진 소파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는다.
해변의 카프카(상) 73p
대학생 행정인턴으로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살던 곳에는 가볼 만한 중앙도서관이 버스를 두 번 갈아타 언덕을 크게 올라야만 이를 수 있는,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주 그 언덕을 오르고 또 오르며 수많은 책에 이르곤 했다. 인턴으로 선발된 후에는 중앙도서관으로 배치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지망을 쓸 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록 배치는 어린이 열람실로 받았지만, 책과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무 기간 한 달 동안 느낀 업무 만족도랄까, 충만감이랄까. 쉬는 시간마다 자료열람실로 달려가 원하는 책을 빌렸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원 없이 그 책만을 읽었다. 인생에서 몇 없는, 한 가지에만 죽도록 몰입한 시간이었다.
살아보니 그런 시간이 주어지는 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그때보다 한 뼘만큼 더 어른이 된 지금은 양껏 독서를 하려면 휴직이나 면직? 밖에는 달리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 물론 퇴근 이후나 주말에라도 독서를 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나는 읽기의 속도가 느린 편이고 언제나 이야기에 온전한 몰입을 원한다. 그래서 호흡이 끊어지는 독서가 늘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루 30분 독서, 이런 건 나와 맞지 않다. 아무리 잘게 쪼개고 부숴봐도 읽고 싶은 책의 양에 비한다면 시간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다.
이동진 평론가님이 책은 물이고, 영화는 술이라고 했던가. 사막을 걸어온 나는 이제야 물을 만나 원 없이 해갈 중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모금씩 물을 들이켜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열람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서 다시 버턴판 <아라비안나이트>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러자 주위의 현실세계가 영화 화면이 페이드아웃되는 것처럼 조금씩 사라져 간다. 나는 나 혼자가 되어 페이지 사이의 세계에 몰입해 간다. 나는 그 감각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
해변의 카프카(상) 108p
지난겨울부터 이용한 이 도서관에서 어느덧 두 번째 계절, 봄을 맞는다. 2층 자료열람실은 빈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오늘은 운이 좋은 나머지 한 자리가 보였다. 자리를 잡아서 읽고 있던 책을 펼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다. 문득 책 속에서 언급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가 궁금해진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같은 작가의 <갱부>와 비교하며 오시마에게 말하고 있는 장면이다. 나는 <갱부>를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유독 몰입해서 읽는다.
잠깐 독서를 멈추고 <산시로>를 찾아보기로 한다. 다행히 자료열람실에 비치되어 있다. 열람실 한쪽 끝, 그러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서 내려 오른쪽을 바라보면 '문학존'이 보인다. 문학 서적으로만 이루어진 큰 서재다. 이곳 안팎으로 문학과 관련된 책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산시로>를 집어든다. 그리고 서가 전체를 돌아보기로 한다. 오늘 대출할 책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빌려 읽으려고 적어온 책 몇 권에 즉흥적으로 선택할 책 몇 권, 다해서 최대 대출 권수인 7권을 채울 예정이다. 고전 문학 섹션에서는 <타타르인의 사막>을 발견해 집어든다. 이것저것 골라보니 8권이 되었다. 제외할 한 권의 책을 가려내야 했다. <산시로>의 도입부를 읽어본 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구입해서 읽기로 한다. 그리고 대여 목록에서 제외. 오늘도 가방 가득 책을 채워버렸다. 책은 무겁지만 마음이 가벼우니 지금은 모든 게 괜찮다.
이곳에 올 때는 주차공간이 넉넉하지 않아 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버스도 타고 걷기도 해야 올 수 있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고생한 것의 이상을 얻어 가니 힘든 걸 잘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생활하고 일하는 지역에서 벗어나 무연고의 숲 속으로 숨어 책만을 생각하고 읽는다. 책 속의 다무라 카프카처럼. 내게 이 도서관은 정말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