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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Sep 06. 2018

그 밤, 싱가포르 랩소디

여자 혼자 싱가포르 여행

세 번째 가든랩소디.


오늘은 스스로 점찍어 둔 명당자리를 차지했다. 누우면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이 발끝에 간당간당 닿고 그 앞으로는 스카이웨이가 스크린에서 갓 떼어온 한 장면처럼 아득히 펼쳐져 있는 자리다. 공연 시작 40분 전부터 곱게 누워만 있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가든랩소디가 시작하면 나무 끝으로 뻗쳐있는 검은색 가지에 조명이 들어온다.
누워서 찍은 풍경들.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면 속눈썹에 빛이 번져 별을 보듯 아련해진다.

헤나를 받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리틀 인디아 방문 기념도 당연히 있었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했던 건 나의 사진을 남기려는 목적이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라 셀카를 찍는 데도 한계가 있었고(웃어도 평소의 웃음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다) 남한테 구걸하듯 사진 찍어달라는 말을 걸기도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서 이곳에 내가 왔었다는 걸 손등으로라도 남기고 말지, 라는 딱한 생각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레이시아 여행이 끝나는 그날까지 헤나 덕을 톡톡히 봤다. 풍경에 감칠맛을 더한 사진들이 다양하게 남게 되었으니까.


이러려고 헤나를 받았지. 후후. 세 번째 날 저녁(그러니까 헤나 딱쟁이가 떨어지기 전)은 내내 이러고 놀았다.

헤나를 받은 직후였기 때문에 검은 딱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마음까지 상하기 전에 아낌없이 찍어두려고 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가만히 누워서 공연을 기다렸다.


구름이 전에는 본 적 없는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올까, 바람이 불. 가든랩소디를 보다 보면 구름도 공연의 일부가 아닐까, 싶은 조화로움이 느껴진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지 종일 내리던 비도 그쳤다. 운이 좋아 다시 번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조명 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란 사람, 3일 연속 운도 좋다.

서서히 손등에서 헤나 딱쟁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말레이시아 랑카위로 날아간다.


그리고 랑카위를 시작으로 페낭, 쿠알라룸푸르, 믈라카의 순으로 여행한 후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와 마지막 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것이 큰 그림. 돌연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예기치 한 사건이 생겨 마지막 날마저 말레이시아에 발이 묶일 수도 있는 것이고, 돌아오더라도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싱가포르와 어떤 작별 인사도 하지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슈퍼트리 그로브 스카이웨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가든랩소디일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평소보다도 절한 마음을 만든다.


항상 그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내가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이유로 오묘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마치 이별을 앞둔 사람처럼. 만약 3년 후에 올 운명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럼 내 나이에 세 살을 더한 그때의 나를 먼저 떠올려보게 되는데, 그러면... 그 자체부터 그날의 여행을 떠올려보기가 싫어진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이것이 마지막 싱가포르 여행이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시간과 비용이 넉넉히 주어진다면 가본 곳보다 가보지 않은 곳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것임을 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의 경로다만.


아무튼 난 지금, 그러니까 미래를 앞서 생각했을 때 3년이라도 젊은 지금을 충만히 누려서(혹은 누리려고 노력이라도 해서) 작별을 하더라도 내 방식으로 제대로 해내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가 한 시간 간격의 가든랩소디 공연을 두 번 다 모두 보고 말았다.


저녁 7시 30분에 있었던 공연 한 번이 끝났을 때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촉감이 좋아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맴도는 공연의 여운도 손을 휘휘 저어가면서까지 헤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누워있는 것이 정말 좋기도 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배우가 연극을 끝마친 후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자신의 무대에 드러누웠을 때 느끼는 그런 후련함과 벅참의 감정을 닮지 않았을상상도 해본다.   


다만 여기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박수란 이 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의 랩소디다.

왼쪽: 자리에 누웠을 때 위쪽 정면으로 보이는 슈퍼 트리의 줄기들.

두 번째 공연(저녁 8시 30분)을 볼 때는 하늘도 참았던 빗방울을 마지못해 떨궜다.


누워서 비를 맞아본 경험이 있는지. (쇼생크탈출 같은 폭우는 예외로)


하늘에서 주저하듯 떨어뜨리는 물방울이 얼굴 위로 똑하고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실상 대단히 개운하고 맑은 것이었다.


경험한 적 없는 자유가 난데없이 하늘에서 토도독 떨어진 느낌.

밤이면 더 예쁘다.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그렇게 두 번의 공연까지 본 후 다시 숍스 앳 마리나베이 샌즈 앞의 강변까지 걸어 나왔다.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낮의 공백을 메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싱가포르 리버 앞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정적인 강을 구경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SF 영화 장면 같은 빌딩 야경을 사랑스럽게 즐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모두가 저마다의 여행에 담뿍 빠져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물론 그렇지만.
지금은 예외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루이비통 아일랜드의 강변 거리를 걸어 헬릭스 브리지까지 걸어 가기로 했다.


한참 걷고 있는데 멀리서 이슬람 음악 소리가 두둥둥 들려왔다.


마치 영화 허트 로커나 제로 다크 서티에서 들려올 법한 (서스펜스 가득한) 배경 음악이다. 어딘가에서 이슬람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 같이 기도 중인지도?그 음악으로 인해서 지금껏 알고 있던 싱가포르의 분위기도 쓱싹, 장면 전환!


문득 이것이야말로 싱가포르의 진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끼고 있던 이어폰도 잠시 풀었다. 한쪽에서는 팝송이 흘러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캐롤이 울려 퍼지며, 또 다른 방향에서는 아랍 음악이 퍼져 나오기도 하는 조화롭게 어우러진 다문화의 얼굴이랄까.


세 번째 날 밤만난 또 다른 싱가포르는 그런 모습이었다.

루이비통 아일랜드 옆으로 나 있는 강변 거리
오늘도 예뻐요, 헬릭스 브리지

헬릭스 브리지를 걷다가 도시 야경을 보며 가볍게 설전 중인 여섯 명의 친구들을 보았다.


이 건물이 무엇이고 저 건물이 무엇이고. 순간 싱가포르를 떠올릴 때마다 종종 생각날 풍경이 될 것만 같아서 재빨리 카메라에 그들의 시간을 담았다.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레이저쇼
: 저녁 8시, 9시 30분, 11시

헬릭스 브리지를 벗어나 주빌리 브리지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의 레이저 쇼가 진행 중이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그저 강변을 지나가다 철망 하나 붙들고는 넋을 놓고 구경했다.


오늘 밤이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 하나가 모든 풍경에 깃들었던 그동안의 정서를 한층 더 깊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무리 되새겨도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이라는 말의 의미.

점점 처절해지는 손등의 헤나. 원래 이렇게 딱지가 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헤나 딱지가 떨어진 후 손등에 남는 진갈색의 문신이 진짜 문양이기 때문.




다시 라우파삿 페스티벌 마켓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사테 거리가 목적이 아니라 현지인이 몰려있는 스톨에서 저녁을 해결하려고 왔다. 스톨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찾아왔다. 가장 편안한 복장의 현지인들이 몰려있는 그곳에 적극 끼어들어 나도 한 뚝배기 거하게 하고 갈 생각으로.

싱가포르의 여느 푸드 마켓이 그러하듯이, 내가 지금 찾아갈 스톨도 당연히 물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입구에 있던 음료 상가에 먼저 들러 아이스 레몬티(1.8싱가포르 달)부터 샀다.

라우 파 삿 페스티벌 마켓 입구에 있는 음료 노점. 이곳에서 타이거 맥주와 레몬티 등 다양한 음료를 살 수 있다.

성키 로컬 딜라이트
SENG KEE LOCAL DELIGHTS

in 라우파삿 페스티벌 마켓

선택한 곳은 성키 로컬 딜라이트 SENG KEE LOCAL DELIGHTS라는 곳이었다. 어떤 음식으로 유명한 스톨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주문하는 지점에 현지인이 다른 곳보다 바글바글 몰려 있는 게 보기 좋아 냉큼 그들 사이에 합류부터 하고 보았다.


얼핏 살펴보니 캐럿 케이크가 유명한 모양이다. 말이 케이크이지 사실상 부침개다.


너 나 할 것 없이 캐럿 케이크를 선택하길래(대부분 테이크아웃) 나도 화이트 프라이드 캐럿 케이크를 스몰 사이즈(3.5싱가포르 )로 주문했다.

라우파삿 페스티벌 마켓 내부. 깔끔한 편이다.

스톨 앞 빈자리에 앉아 있다 호명된 이름을 듣고 음식을 받아왔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를 들이켜 본격적인 식사 시작.


원래 당근은 먹지 않는다. 어릴 때 급식의 트라우마라고 해두자.


그런데 이 부침개 사이사이 껴 있는 하얀색의 당근은 감자처럼 잘 부서지면서도 특유의 당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맛있네? 이러면서 금방 한 그릇을 뚝딱해버렸다. 지금 이렇게 당근 씹는 나를 엄마가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시려나?헤헤

 가끔씩 몰아치는 느끼한 맛에 온 입안이 괴롭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미리 사 둔 아이스 레몬티가 나를 그 기름으로부터 끄집어 내주는 열일을 다했다. 음, 완벽한 조합이다.

아이스 레몬티 (1.8 싱가포르 달러)

양은 적었지만 한 끼 든든하게 해결한 듯한 좋은 느낌을 안고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 아침 일찍 창이 공항으로 가야 하니 오늘은 조금 일찍 자야.


화이트 프라이드 캐럿 케이크 스몰 (3.5 싱가포르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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