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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un 22. 2018

팔라완 비치, 코카콜라, 그리고 남쪽의 끝

싱가포르 여행

열기가 대단했다.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으면 그 뜨거움이 손금을 타고 고스란히 팔끝까지 전해졌다. 실로소 비치의 목조 파라솔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 이제 다시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벗어났는데 곧이어 아, 도저히 안되겠다는 혼잣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5분도 채 걷지 않아서 습기로 옷이 쩍쩍 달라붙고 땀방울은 주르륵주르륵.


팔라완 비치로 걸어가는 길에 The Fun Shop이라는 기념품 샵에 들렀다. 기념품이고 뭐고 에어컨 바람으로 막힌 숨통을 터야 했다. 머그컵이나 필통을 만지작거리면서 괜히 고르고 있는 척 흥미 있는 척. 가열된 몸을 식혔다.


이날 걸었던 대략적인 경로라고 할까

팔라완 근처에 이르렀는데 심한 갈증을 느꼈다.


짠맛도 당기고 탄산음료도 아른아른. 그때 키자니아 몰로 행진하며 들어가는 아이들이 보였다. 따라서 함께 후발대로 들어왔다. 몰이니까 시원하겠지 카페라도 있겠지 싶었는데 실내는 찝찝하리만치 미적지근한 공기가 떠다니고 있었고 기대했던 카페는커녕(루프탑 카페라는 곳이 있긴 한데 가볍게 커피를 마실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쉴만한 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센토사 섬의 전경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루프 가든에 올라왔다. 생각지도 못 한 이곳에서 대단한 풍경을 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역시 혼자였다. 남녀 청소부 두 명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기를 올라오는 사람이 다 있군, 이라는 말이 읽힌다. 마치 무슨 목적으로 올라온 거냐고 캐묻는 듯한 눈빛. 이런 눈길은 익숙해질 수밖에.  


저 멀리 아시아의 최남단(THE SOUTHERNMOST POINT OF CONTINENTAL ASIA) 지점이 있는 팔라완 아일랜드가 보인다.

멋지지 않나.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딘가의 끝이라는 사실이.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기분이다.

세븐일레븐을 보고 주저 없이 들어갔다. 어떤 여자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냄새에 이끌려 라면을 먹을까 잠시 망설이다 뭔가 성에 차지 않아서 감자칩을 고르기 시작했다. 체내의 소금기가 다 빠져나간 지금, 난 그보다 독한 짠맛이 필요했다.


3번 섬이 팔라완 아일랜드. 이곳에 아시아 최남단 지점이 있다.

후후. 가장 짠맛을 보장하는 듯한 가루비 바베큐 맛 감자칩과 콜라 한 캔을 사들고 터덜터덜 해변가로 걸어왔다.


느낌이 좋았다. 지금까지는 센토사에 대한 감흥이 희미했는데 왠지 이곳에서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센토사에 관한 한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추억 거리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해변가 앞에 앉을 만한 바닥을 찾아 털썩 주저앉고 다짜고짜 콜라 캔부터 땄다. 그리고 시선 따위 흥흥거리며 감자칩을 뜯기 시작했다. 태닝을 즐기고 있던 한 남자의 눈길이 잠깐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가 보다 하고 내 시간을 존중해주기로 한 것 같았다. 다시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센토사는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함(peace and tranquilit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어원에 충실히, 인생에서 몇 안되는 가장 맛있는 콜라와 감자칩을 아삭아삭 먹으며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고요함을 즐겼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이 순간을 기억하고 또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혼자 여행 온 듯한 다른 여자가 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차림새만 보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위아래로 검은색 옷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나를 몇 번이나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척했다.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조금 더 내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은 이 세상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 앉아 감자칩을 쩝쩝거리며 음악을 들었다.


바다는 햇살을 품어 별처럼 반짝인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나뭇잎 사이로 태양이 보였다. 잠깐 이어폰을 빼고 파도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물놀이를 즐기는 노부부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내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한 모양이다. 오감이 섬세해지고 있었다. 모든 찰나가 기록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느낌과 함께.

거하게 디저트를 드신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남쪽의 끝으로 가야겠다.


이렇게 고운 모래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냥 두어도 금색인데 태양을 머금어 찬란하기까지 하다.

한 손 가득 모래를 움켜쥐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펴보기를 몇 차례. 질감이 따뜻했다. 바닷물이 이토록 투명하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

팔라완 비치에 아시아의 최남단 지점이 있다.

그것을 기념해놓은 지점은 팔라완 아일랜드에 있어서 이곳까지 넘어갈 수 있도록 사이에 짧은 흔들 다리가 놓여있다. 여기만 넘어가면 된다.


팔라완 아일랜드까지 이어주는 흔들 다리
흔들 다리에서 내려다 본 바다. 투명하다.

그런데 최남단 포인트로 만들어놓은 정자가 공사 중인 상태였다. 올라가서 전망도 보고 기념도 해보려고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가볍게 섬만 둘러 보기로 했다. 정자에 들어갈 수 있든 없든 내가 아시아의 가장 밑에 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센토사 섬에서 팔라완 아일랜드까지 수영해서 건너올 수도 있는 모양이다. 그 중간 지점에서 물놀이 중인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걸 보면.

전망에 특별한 건 조금도 없었지만 그 의미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의 끝에 와있다는 사실 말이다. 예전에 영화 해피투게더를 보면서 세상의 끝이라는 남미 대륙 우슈아이아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낭만은 머릿속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제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버렸다. 팔라완 아일랜드는 우슈아이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난 이곳도 엄밀히 말하면 '끝'이기 때문에 좋았다.


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자랄 수 있지? 라며 내내 궁금하게 만들었던 야자수 한 그루
팔라완 아일랜드에 있는 센토사 조각
팔라완 아일랜드에서 참 예쁘게 쉬고 있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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