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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y 08. 2018

따뜻한 밤, 라우파삿 사테거리에서

싱가포르 여행

두 번째 날.
대망의 저녁 식사는 라우파삿 사테거리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사테(동남아시아식 꼬치 요리)를 정말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장소 선정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목구멍에 걸린 사과 껍질처럼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혼자 가야만 한다는 사실. 사진으로 보아하니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에 너 나 할 것 없이 노니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던데 아무리 의연하게 혼자 떠난 여행이라고 할지라도 의식하지 않음의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테를 향한 식욕이 그 밖의 모든 장해를 뛰어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또 어떤 감정을 느끼고 행동할지 경험이나 해보자며 마른 과일에서 과즙 쥐어짜듯 최대치의 긍정을 끌어냈다.

목이 타서 편의점에서 사 마신 오렌지 주스. 그 와중에 건강 생각한다고 NO SUGAR ADDED.


상해에서 처음 보고, 얼마 전에는 잠실 롯데월드몰 앞에서도 봤던 스페인 조각가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이 이곳 싱가포르에도 있었다.

라우파삿 사테거리를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싱가포르는 작고 야무진 나라이니까.

정식 명칭은 라우파삿 페스티벌 마켓으로 출구 바로 바깥에 사테거리가 들어선다. 이 장소가 재미있는 까닭은 저녁 7시만 되면 낮엔 일반 도로였던 곳에 다다다다 사테 노점이 들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로 한복판에서 사테로 축제를 벌이는 독특한 느낌이 충만하다고 해야 하나. 이미 여행자들에게 알려질 대로 알려진 장소라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반드시 가볼 만한 매력적인 장소임엔 틀림없다.

처음 마주한 라우파삿 마켓의 외관은 오래된 기차역처럼 고풍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사테거리에 진입하기에 앞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켓 입구에 있던 음료 판매 노점에서 타이거 맥주 스몰 캔(4.8싱달)을 먼저 샀다. 라우파삿 사테거리의 주문 시스템은 사테 따로 맥주 따로다. 음식을 주문하면서 선불 결제하는 시스템인 특성상 사기를 치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리뷰를 보니 어떤 여자가 메뉴판을 주면서 주문을 받은 후 돈을 가져갔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돈만 받고 주문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기꾼이더라. 등등. 그래서 나는 맥주만 입구에서 미리 사고 사테거리로 나왔다.

라우파삿 사테거리

이런 곳에서 터를 잡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국적을 알아보는 특유의 노련함이 장착되어 있는 것 같다.
사테거리로 나오자마자 어떤 아저씨가 얕은 한국말로 심하게 아는 체를 했다. 일단 한국인이구나 싶으면 호객 행위가 더 뜨거워지는 걸 보니 느낌이 쎄하다. 사테 먹으러 왔다고 하니 7번? 8번? 한국말로 정신없이 묻다가 뭐가 뭔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내 자리를 안내해준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다행히도 한 테이블만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비어 있었다.

7, 8번 사테 노점은 같은 사람이 운영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지 리뷰에서 자주 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냥 이런 곳은 그 사테가 그 사테일테니 굳이 가릴 필요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자들에게 노련한 곳일수록 경계하게 되는 곳이 있는 반면, 이런 푸드 마켓에서는 차라리 너도 나도 좋다는 노점을 믿어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털썩 자리에 앉아 벌써부터 낯익은 메뉴판을 살폈다. 혼자니까 SET A(사테 26개)를 1인용 맞춤으로 13개만 주문하기로 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SET A라고 하면 13개만 주문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듣는다. 편하기도 하지. 가격도 26싱달의 반값인 13싱달만 내면 된다.

주문과 결제까지 마치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왠지 조용해진 내 옆 테이블. 슬쩍 살펴보니 한국인이었다.
아니, 사방이 한국인이었다! 그들도 내가 같은 민족임을 알아채고는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졌다. 혼자 왔는데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한국인이다! 뭐 이런 생각 중이었을 테다. 오히려 혼자 와서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고민거리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도리어 내가 뻘쭘해져서 사테가 나올 때까지 보이스톡으로 남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치고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와서 타인의 눈치를 살필 게 뭐야. 난 지금 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에 있다. 그곳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을 일부러라도 경험해보려고 돈을 주고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란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관심사와는 정반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주변에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하
이쯤에서 사테거리에 혼자 가도 괜찮을지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감히 해주고 싶은 말은, 처음 자리를 잡기까지만 스스로 민망할 뿐 그 순간만 지나고 나면 오히려 오기를 잘 했다는 뿌듯함은 물론 배로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빠져든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대견하고 흐뭇했다. 은근히 뻔뻔한 구석이 생각보다 많네? 라고 혼자 손뼉 짝짝 좋아하기도 하면서.

그런데다가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 자신에게 그렇게 큰 관심도 없다. 나 혼자 왔다고 뭐라고 쑥덕이려나? 괜히 이런 것들 쥐똥의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들도 나처럼 본인에게만 신경 쓰고 싶어서 여행 온 거 아닌가. 타인에게 신경을 쓰느라 소모하기엔 그들의 시간도 내 것만큼 소중한 거다.

SET A의 1인분(13싱달) / 치킨 꼬치 5개, 소고기 꼬치 5개, 새우 꼬치 3개 + 타이거 맥주(4.8싱달) / 먹다 보면 손에 기름과 양념이 잔뜩 묻어버리기 때문에 휴지나 물티슈를 미리 챙겨오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별도로 제공도 안되는 데다가 오히려 휴지 사라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사야만 한다.


만족스럽게 사테를 하나하나 집어 손가락까지 쪼옥쪽 훑어 먹다가 문득 주변의 사진을 찍고 싶어서 돌아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건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의미가 담긴 눈빛은 아니었다. 그냥 한 여행자가 또 다른 여행자를 바라보는 흐뭇함? 과 같은 느낌이었다. 가벼운 미소로 눈인사만 나눈 후 다시 사테에 몰입했다.


무척 맛있고 흡족했다. 사테와 타이거 맥주의 조화라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환상적인 맛이었다.

싱가포르에서 그리워할 만한 한 가지가 여기서 더 추가됐다. 다음엔 소중한 사람과 다시 한 번 찾아와야지.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아서 냉큼 털고 일어났다.

기름과 소스로 잔뜩 지저분해진 손은 아랑곳 않고 카메라를 든 채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사테를 굽느라 정신없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그 굽는 과정을 옆에서 빤히 지켜보기도 하고. 인사를 나누며 맛있었다고 칭찬도 해주고.

한국에 돌아가서 홍보도 해달라고 이야기하길래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곳에서 즐겁고 맛깔나는 시간을 보낸 건 어쨌든 사실이니까.

7번, 8번 사테 노점 직원. 한국인이 많이 찾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

적당히 사진도 찍고 현지인도 구경하면서 그 장소를 떠나지 못 하고 기웃기웃하고 있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이런 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노점들은 바쁘게 철수를 시작했고 사테를 먹던 사람들도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생각보다 빠르게 끝난 축제 분위기에 얼떨떨한 기분만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사람들을 따라서 실내로 같이 쓸려 들어왔다.

마침 화장실 바깥에 수돗가가 있었다. 보이는 곳에서 손을 씻고 나중에 살펴보니 그곳은 남자 화장실 구역의 수돗가였다. 이크.

수돗가도 남자 쪽 여자 쪽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제 차이나타운에 있는 시크 캡슐 오텔로 돌아가야겠다.

벅찬 일정을 소화한 건지 몹시 노곤했다. 눈꺼풀의 무게도 체감상 만근이 넘었다.


지도도 보지 않고 익숙하다 싶은 길을 향해 척척 숙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레 걷는 나 자신에 은근히 놀라기도 하면서 다시 한 번 뿌듯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지금 올라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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