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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Nov 08. 2018

그때 내가 본 경주

경주 여행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을까


구름 자욱 어느 흐린 날.

문득 경주가 가고 싶어졌다.


왜, 그럴 때 있지 않나.

전에 몇 번은 다녀온 곳인데, 그때가 아닌 지금의 눈으로 그 장소를 다시 보면 어쩐지 달리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아니지. 미련이 때 말이다.    

페트 커피에서 fete coffee

최초의 경주 여행은 (들추어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시절이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에도 께름칙해서 원.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성인이 되어 제대로 여행한 건 2014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첫 회사를 다닐 때였고, 금요일 저녁 퇴근하자마자 떠나 일요일에 돌아오는 알찬 일정으로 경주를 계획했다. 어떤 고된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여서 마치 팽팽하게 묶여 있던 끈이 급하게 풀린 듯 긴장이 너덜너덜 풀려버렸다. 그리고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때는 혼자서 떠난 여행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한 여행이어서 타이레놀 한 알과 종합 감기약 한 알만으로 어떻게든 하루씩을 간신히 버텨냈는데, 이것이 나의 경주 여행에 대한 첫 추억이다.


그러고 보니 4년 사이에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상실을 경험한 게 첫 번째. 그것으로 얻은 것도 물론 있겠지만, 잃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도 한 손에는 과거라는 끈이 꼬옥 붙들려져 있는 상태다. 이 또한 언젠가는 놓아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력하기만 하다. 그저 때가 와주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경주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그때의 경주 말고 지금의 나를 위한 경주를 새롭게 다시 기할 수는 없을까, 하고.

동궁과 월지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저녁


그럭저럭 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일상의 것이라면, 경주에서 경험한 것은 아무래도 일탈이었다.  

첨성대로 가는 길에 귓가에 노래 하나가 앉았다. 여행하는 내내 이 노래를 들었다. 준비해 간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추억을 새겨오는 일 일반적이지만, 가끔씩 운이 좋으면 이렇게 여행지에서 음악이 나를 직접 찾아오고는 한다. 경주도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첫째날 저녁,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황리단길을 산책했다. 장소와 음악, 기분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현실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스윽 바뀌었다. 이게 진짜 영화라면, 편집되지 않을 주요 장면. 보통 여행지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장소는 굳이 사진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마음으로 기억하게 되더라.

 



 

대릉원

아참, 내가 말했던가.

이번 경주 여행은 혼자 한 여행이었다. 어쩌면 시간 평소보다 더 느리게 흘러간고 착각한 것도 그 때문인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야 많았다. 내딛는 걸음걸음을 의식하,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에 대해 신중고민해 기회 또한 많았다.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생 굳이 마다하지 않다. 돌이켜 보면 후회로만 물드는 아픈 시간도 머리가 시키면 가슴으로 생각해보려고 힘썼다. 음과 삶이 공존하는 낭만의 장소, 대릉원을 걸을 때 특히 그랬다.

경주에서 산 책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


철이 든 건지는 몰라도.

포기가 어렵지 않아졌다. 그 대상 가운데 인간관계에서의 내려놓음이 쉬워지고 있다는 건 스스로를 참 서글퍼지게 만드는 변화다. 전에는 관계에 이 벌어지면 배의 노력과 정성을 들여서라도 이음새를 감쪽같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를 나의 인복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이어 붙이는 게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결국 배운 건 이거다.

이제는 노력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와 현명함 갖추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 아마 이것이 가장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수행이 되겠지.

열심히 걸었다. 두 다리의 건강함에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때로는 얼마나 큰 감사함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첨성대, 그리고 동궁과 월지를 이틀 연속 오갔다.

시간과 함께 걸은 느낌이랄까. 가는 사이 저녁이 되고 오는 사이 밤이 되고는 했다. 경주는 어둠이 이르게 찾아왔는데, 저녁만 되면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밖이든 안이든 모든 곳이 소란스러운 장소에서 찾아온 외지인은 그저 갸우뚱하며 적막한 경주를 걷고 또 걷는다.

로스터리 동경.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커피 세 잔을 마시는 사이


경주에서 알게 된 한 가지.

아인슈페너의 참맛이다.


번째 날에는 황리단길에서 시간을 보냈다. 2박 3일 동안 아침의 경주는 누리지 못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늦잠을 자며 늑장을 부린 게으름 탓이다. 내일은 불국사에 가야지, 내일모레는 대왕암에 가야지, 해놓고 아침마다 빠릿하게 움직이는 데에 실패해 오후 시간까지 쿨쿨 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덕에 알게 된 것이 숙소와 가까운 곳에 있 황리단길의 커피 맛이다.     


어쩌다 하루에 세 곳의 카페를 돌았다.

커피를 물처럼 달고 사는 생활 습관이 있어 오히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경험에 속했다. 평소에 즐겨 마시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러나 여행까지 왔으니 이곳에선 다른 걸 마셔보고 싶었다. 아인슈페너와 플랫화이트를 선택했. 커피의 또 다른 참맛에 퐁당. 서울에 올라온 지금까지도 새로운 아인슈페너를 찾아 카페를 뒤적뒤적 찾아다니고 있다.


여행을 일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소소한 발견들이 있다. 경주에서 내가 발견한 건 커피인 셈이다.

여행 중엔 반드시 치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좋아하는 시 중에 경주를 여행하면서 다시 꺼내 본 시가 있다.

로세르토 후아로스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존재하지 않는 새들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발견했다.

어디에나 있는 그림자가

그들의 본체에 닿았다.

존재하는 단어들이

그들의 정적을 다시 획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가끔은 그것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준다.

중요한 어떤 것이

저울의 빈 접시에 올라감으로써.

어서어서

무언가를 보고, 하고, 쓰기 위해서 일정을 꽉꽉 채워 떠나는 출장과 여행에 익숙한 나에게 올해의 경주는... 경주는...

아무도 나를 찾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새벽 시간과도 같은 환상이었다.


떠나는 날에는 가장 그립게 생각 날 것 같은 카페를 골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방문했다. 로스터리 동경이다. 아인슈페너 한 잔을 주문하고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늘여서 천천히 음미했다. 영화 중경삼림 중 이별 편지를 앞에 둔 양조위가 블랙커피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마시려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떠나기 전의 내 마음이 아마도 그와 같았을 거다.

그리고,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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