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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Jan 14. 2019

남산에 올랐다

풍경이 변하고 룰이 바뀌었다


그동안 표현하는 방법만 알지 못했을 뿐이지, 나를 둘러싼 풍경이 마치 영화 속 갑작스러운 시퀀스의 전환처럼 배려 없이 바뀌었다. 지금도 꾸준히 적응 중이고 앞으로도 (약간의 불확실한 마음을 얹어) 1, 2년은 부단히 노력을 지속해야 될 것 같다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 날들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의 일인데, 사실 나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게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잠시 내려놓고 해야 하는 것에 매진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뿐이다.

다양한 진로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배우는 요즘인데

인격 성장이라는 건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할 길이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모난 성질은 해가 변해도 그대로인 것 같고 자존감은 어째 날이 갈수록 우수수수. 꼭 낙엽과도 같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어른이 되고 싶다.


사는 곳에서의 고민이 버거울 정도로 많아지면 어느 날 습관처럼 떠나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까지 머물다 돌아오고는 했다. 그런데 이런 습관도 결국은 여행을 가장한 도피일 뿐이라(이걸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랄까) 이제는 나의 모든 힘듦을 되도록이면 일상에서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어디로 얼마나 떠나 있든, 언젠가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희미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 치고, 너무 현실적인 말인가요.     

그날, 태양의 잔상이 되어


남산은 주로 두 가지의 이유로 오른다.

하나는 날이 좋아서, 다른 하나는 고민이 깊어서.

요즘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1/4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1/4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1/4은 희망하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1/4은 흐뭇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단계에 와 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되게 하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이러저러한 생각을 거듭하며 금싸라기 같은 햇살을 받고 익숙한 목멱산의 이 길을, 중력을 거슬러 한 발 한 발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이별을 겪은 친구가 대뜸 물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적이 있느냐고.


평소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아.

라고 쿨한 척 못을 박아 버리고 마는데 남산을 오르는 지금, 갑자기 이 질문이 떠올라 그에 대한 생각을 좀 해보려고 한다. 시간도 정확하게 답해줄 수 있다. 2010년 8월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뀌는 것 하나 없이 겪었던 그대로를 다시 겪어야 하는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 그때부터 약 10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한번만 지나오고 싶다. 별에 스치듯 바람처럼 지나간 그때의 감정들을 현재에 미련없이 보내줄 수 있도록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누려볼 것이다.


뭐, 다 힘이 없는 말.

그뿐이지만.  

사람에게 짝이 있는 것처럼 음악도 그 인연이 되는 순간이 따로 있다.

음악만 잘 만나면 아, 지금은 죽을 때까지도 기억할 수 있겠구나 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찾아온다.


말레이시아를 혼자 여행할 때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이동하던 날의 일이다.

아침부터 먼지가 풀썩이도록 분주하게 움직이고 겨우 제 시간의 알맞은 버스에 올라탔다. 한껏 떠 있는 마음을 누구라도 눈치챌까 얌전한 척 가라앉히고 1인 좌석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나 스스로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는 거다. 여기서 조금만 더 부풀려 보자면, 이대로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겠다 라는 자신감까지 들 정도였다. 촉촉한 여름 비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환상에 슬며시 젖어들어, 나 자신과 좋은 추억을 쌓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 꽤 멋진 순간.


플레이리스트에서 Bee Gees의 How deep is your love가 재생됐다.

이 음악만 들으면 버스 안에서 경험한 나와의 좋았던 추억이 떠올라 자존감이 조금은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여행도 아편처럼 순간의 즐거움이 전부가 아닐까 의심했던 지난날의 작은 마음이, 이건 절대로 사라지는 무언가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굳게 한 계기 중 하나.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 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환상의 빛

환상의 빛


오후 6시쯤이었나.

찬 바람이 불고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아스라이 시간의 흐름이 보였다.

 

한창 정상에서의 시간에 몰입해 있을 때, 바로 옆에 서 있던 다른 나라 여행자들이 해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한 편의 영상 추억이 떠올랐다. 웃음소리, 그리고 뭐라 뭐라 내가 그대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가 블러 처리한 사진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찬 바람이 잠깐이나마 미풍처럼 느껴졌던 건 느닷없이 떠오른 이 기억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첫 회사를 그만두면서 입사할 때보다 더 큰 마음고생을 했다.

퇴사하겠다고 말을 했을 때 상사가 세 번의 생각할 기회를 얹어 주었다. 지금은 섣부르다, 이렇게 나가서 무얼 할 거냐, 반드시 후회할 거다. 등등


그러니 한 달 정도만 다시 생각해보고, 그래도 변치 않는다면 그때 또 이야기를 다시 해보도록 하자.


인복이 좋아 배울 점이 많은 상사였다.

지금도 그녀에게 배운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있다. 찔끔찔끔 수시로 놀랄 정도로 내가 그분의 행동을 보고 배워놓은 것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퇴사를 감행했다. 그 이후 (상사의 예상과는 달리) 돈 주고도 해낼 수 없는 다양한 내적 경험을 했다.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으며 여행을 다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불어 평범하게 사는 일의 어려움이라는 나름 고차원적인 인생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오마메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얼굴을 다시 한번 가볍게 찌푸린다. 하지만 별수 없다. 내게 주어진 조건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1Q84

태양이 강 건너 어디쯤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면서 역 앞 스타벅스에 들렀다. 단 거는 마시고 싶은데 커피 말고 다른 단 거를 찾다가 그린티 라떼를 선택했다.

오늘 참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나간 하루다.


정작 시끄러운 건 내 속 하나였던 것 같아 풍경에 죄스러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이런 날도 결국엔 이 계절처럼 훌쩍 지나가 언젠가 일부러라도 추억하고 싶어 하는 그런 날이 찾아오기는 할까.

 

남산을 한 번 다녀오면 기억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일상에서 미루고 미뤄온 생각들, 혹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 외면한 기억의 존재에 대해서 날을 잡고 체화하는 의식이라도 치른 것처럼 후련하다.  


아, 그게 이유였나 보다.

주기적으로 남산을 그리워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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