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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Apr 07. 2019

다시 가더라도 거기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에서

올드타운 화이트커피에서 짭조름한 점심 식사를 마쳤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지타운을 걸어볼까. 


더위가.. 이럴 수가 있나 싶다. 고작해야 반 브이넥 티셔츠만 입고 있는데 오른팔이 따끔따끔 지글지글 타고 있는 듯한 좋지 않은 느낌마저 든다.

볕이 한창인 시간, 오후 2시 반.


페낭의 더위는 말레이시아의 모든 더위가 덤벼도 택도 없을 듯. 나름 살인 더위라는 말을 많이 보고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온 도시라 선크림도 겹으로 겹으로 발랐지만 그것만으로 어림도 없었다. 다른 도시들, 그러니까 랑카위 쿠알라룸푸르 믈라카, 그리고 싱가포르에서조차 멀쩡했던 피부가 이곳 페낭에서 뒤집어졌으니..!


모자를 쓴 정수리에 계란을 올려놓고 걸었다면 저녁 즈음 편하게 프라이를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날 조지타운을 세 시간 걷고 발가락 물집과 입은 옷 모양 그대로 몸에 흔적이 남았다)

그날 여행에 참고했던 페낭 벽화 지도 / 출처: http://blog.naver.com/pioneer2013/10189010127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태양 밑을 바투 걷는 듯한 괴로운 느낌을 받아가며 걸으라고 누가 등을 떠민 일도 아니었으니까. 편하게 카페에 들어가 얼음 띄운 바닐라 커피를 마신다거나, 혹은 숙소에 머물 해가 식기를 기다리다 밤 즈음 슬렁슬렁 재즈 카페를 찾아 음악을 즐기더라도 페낭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페낭으로 남았을 테다. 그런데 아무도 시킨 일이 아님에도 세 시간 이상을 걸어야만 했던 이유는..그 어떤 타인의 강요보다도 무서운 스스로의 집착에 가까운 의지에 있었다. 여행 말미에 "내가 결국 이것 때문에 페낭을 걸었구나"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고생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이 고생을 누구에게 탓을 돌리겠나.

페낭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


내일이면 쿠알라룸푸르로 넘어간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페낭을 이틀로 잡고 쿠알라룸푸르는 하루로 결정했어도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이곳에서의 기억,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조지타운에서 하고 싶었던 건 하나다.


가능한 한 많은 벽화를 찾아보는 것! 그중에는 반드시 보아야 하는 벽화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어린 남매가 자전거를 타는 그림이었다.


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이라는 곳까지 나를 이르게 한 멋진 벽화이니까.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그리고 건물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색다른 벽화가 나타났다. 덕분에 음악을 곁들여 걷는 시간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밀조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숍하우스들이 어찌나 알록달록 예쁘기만 하던지.


청량한 하늘빛에 부드러운 파스텔 색감이 조화로워 어느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그것이 곧 페낭이었고, 조지타운이었다.

이국적인 느낌이 유난히 더 강했던 건 나와 같은 동양인 여행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려나(특히 한국인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오히려 서양인 백패커가 흔했다.


서양인이 동남아시아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우리가 유럽을 생각할 때의 그런 느낌과 비슷할까?

감각적인 벽화가 다양하다. 벽화만 찾아보더라도 구석구석 조지타운을 돌아보는 셈.

평소 길을 꽤 잘 찾아다니는 편인데 결정적인 순간에 헤매는 이상한 단점이 있다.


 벽화만  좀 쉬어야지, 라고 생각지만 애먼 길만 돌고 돌아 같은 스트리트를 몇 번이나 걸었는지 모른다.


혼자 뙤약볕 아래에서 분기탱천 씩씩.

이 더위에 지친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개가 실신한 듯 드러누운 채 헥헥.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통로에 놓인 수도꼭지. 그리고 여기에 어울리는 재치 있는 벽화.


하늘은 이토록 푸르른데
인력거를 끄는 아저씨도 지쳤고
탈수 증상으로 손이 덜덜 떨려 세븐일레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물은 1.6링깃(약 500원)

걷는 내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머릿속에 지도를 띄어 놓고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의 위치와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의 위치를 떠올렸다.


모든 걸 내려놓고 찾아와야 했을 만큼 이 여행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뭐였어?

걷는 동안 했던 생각들, 여행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경험과 기술, 그리고 마침내 감정을 글로 표현하면서 겪은 몇 번의 시행착오들.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으로 얻은 것이랄까.


그러고 보면 여행지가 꼭 말레이시아여야 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순간을 함께 해준 장소가 고맙게도 내겐 페낭의 조지타운이었을 뿐.

YAP TEMPLE 이라는 곳. 장소가 어디이든 종교가 무엇이든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페낭까지 오게 된 계기는 객원기자로 참여하고 있는 트래비 덕분이었다.


표지 사진에 (내가 지금 찾고 있는) 벽화가 실렸는데 그 순간 아, 이 그림은 직접 보러 가야겠 라는 생각들었다. 보통 이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는 여행지라면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길을 실제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더라고.


여행도 사람처럼 다 인연의 문라는 생각도 든다.

나를 보고 웃어주다 카메라가 부끄러운지 다른 곳을 보고 웃는 아저씨. 어쩌다 마주치는 이런 따뜻한 사람들의 미소 하나 둘이 쌓여 결국엔 페낭이 다시 여행하고 싶은 장소가 된 것 같다.

골목골목 고양이 벽화도 많다. 고양이 그림을 위한 지도가 따로 존재할 정도.
드디어 찾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던 이 벽화. 이 그림 하나를 보러 페낭까지 왔다.

그 벽화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 나타났다.


한쪽 방향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앙증맞은 이 벽화 저 벽화를 감상하다 무심코 그 상태로 뒤를 돌았는데 그곳에 딱!


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벽화가 나를 보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 혹은 셀카를 찍고 싶다는 생각. 어떤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눈동자에 각인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오래도록 바라보고만 싶었다. 눈을 감아도 이 장면을 언제고 다시 재생해낼 수 있을 만큼 오래도록. 정면에서 볼 수 있게 작게 돋 보도블록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악은 다비치의 '받는 사랑이 주는 사랑에게'를 선택했다.

이 그림이 각별했던 건 아무래도 동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보는데 누나의 뱃자락을 꼭 껴안고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아이의 표정이 꼭 어린 시절 동생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 뭉클함이 몽글몽글몽글. (감정에 취해 동생에게 사진을 보내줬는데 이미 어른이 된 동생은 현실 무미건조. 뭐 아무튼.) 한 4-50분 정도 음악을 들으면서 앉아 있었다. 이 그림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반짝하고 찾아온 기적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놓아줄 만한 용기가 그 순간의 내게는 없었다.



웅성웅성 단체 중국인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에게도 이 그림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곧바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흘러가는 대로 또 걷기 시작했다. 그냥.. 소소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그걸로 됐다.

언제부터인지 내 뒤로 한 중국인 가족이 따라붙었다.


내가 벽화의 위치를 알고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쁠 건 딱히 지만 대놓고 동행하듯 따라붙어서 좀 난감했던.. 

이보다 사진으로 남긴 벽화는 훨씬 더 많다. 줄이고 줄인 것이 이 정도라고 해야 하나. 앙증맞은 그림에서부터  가득 채운 그림까지 취향을 건드리는 이국적인 벽화가 가득하다.

이렇게 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벽화도.

만약 말레이시아를 가는데 한 군데만 다시 갈 수 있는 조건이라면, 난 망설임 없이 조지타운.


 잠깐의 행복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위해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한다는 것의 가치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 것인지 걷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했었다. 삶이라는 것도 이와 다른 것은 결코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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