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오리엔탈 빌리지의 다음 목적지는 체낭 비치 Pantai Cenang 다.
아지즈의 택시에 몸을 맡겨 편한 마음으로 도착했다. 랑카위에 머무는 동안 아지즈와 허물없이 지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생각은 그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물론 있었기에 가능했지만(마리 게스트하우스에서 추천해준 전속(?) 택시 기사님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랑카위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현지인 상대가 아지즈 뿐이었다는 이유도 컸다.
그와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체낭 비치에서 숙소로 돌아갈 때쯤인 저녁 8시에 이곳으로 다시 태우러 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몇 시간 전부터 예약하는 건 안된단다. 나를 체낭 비치에 내려준 후에도 다음 승객을 태우러 곧바로 움직여야 하는데 저녁 8시쯤에는 자신도 섬의 어느 위치에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솔직히 아지즈가 아닌 다른 택시를 잡는 건 안전상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더니 랑카위 택시의 95퍼센트가 안전하다며 그 점은 장담할 수 있단다. 그럼 나머지 5퍼센트는? 난 그게 걱정이라고.
오리엔탈 빌리지에서 체낭 비치까지 택시 요금: 30링깃 (약 7,700원)
체낭몰 앞에서 하차했다.
내가 랑카위를 대체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스타벅스 마크를 보자마자 내심 놀란 한편 마음이 놓였다.
좋다. 체낭비치에서 석양을 본 후 체낭몰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라며 나름 큰 그림을 슥삭 그려놓고 룰루랄라 비치로 향했다.
체낭 비치
Pantai Cenang
11월 체낭비치의 선셋 타임은 저녁 6시 50분에서 7시 사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6시 10분. 여유롭게 해안가를 산책하다 선셋 타임이 오면 모래 위 따뜻한 자리에 앉아 작열하는 태양과 마주할 생각이다.
비치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보였다. 길고 긴 해변이다.
* 체낭 앞에 붙는 Pantai는 말레이 어로 해변이라는 의미
바다를 마주하고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체낭 비치를 혼자 걷는 한국인 여자.
나를 본 호객꾼들은 그야말로 신이 났다. 온갖 해양 스포츠 도구(?)를 대여해주는 말레이 남자들이 이거 할 생각 없냐, 저거 탈 생각 없냐 라며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말을 걸었다. 마치 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군다. 이미 서울에서부터 대찬 거절이 일상화되어 있던 나는 이들에게도 별다른 죄책감 없이 단칼 거절을 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도 채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미안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지인 주제에 풍경의 따뜻함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달까. 음. 순박한 사람들에게 혹시라도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다음에는 살짝은 웃으면서 거절해야겠다.
여기,
석양이 아름답다고 했다.
뭐, 소위 전 세계 순위권 안에 드는 명소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세상 모든 곳을 다녀보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매긴 순위 같은 거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물과 빛에 섞여 있는 사람들. 거울처럼 지상의 것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말간 바닷모래들. 어쩌면 저 안의 세상이 진짜인지도 모른다.
눈으로 파노라마 사진을 남기듯 수평선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천천히 훑다 보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을 떠다니던 먼지들이 차악 하고 가라앉는 것만 같은 평안한 감상의 시간.
안겨있는 듯한 따스함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온다. 찰나의 행복이 스쳤다.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체낭비치.
랑카위의 체낭비치라고.
나는 지금 말레이시아 랑카위의 체낭비치라는 곳에서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에 두고 온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여행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이토록 좋은 여행에 내가 치를 대가가 있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 당장은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고마운 마음만 들 뿐이었다.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고 그들과 함께 이곳을 다시 찾고 싶었다. 이 경험을 양분 가득한 토양으로 삼아 글이라는 열매로 세상에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좋은 여행이라 그런가.
좋은 생각만 떠올랐다.
걸어도 걸어도
끝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컬러풀한 히잡을 쓴 한 여자를 거리를 둔 채로 졸졸 따라갔다. 그녀의 히잡은 바닐라 스카이 아래 피어난 나뭇잎처럼 생기롭고 아름다웠다. 이곳을 여행하며 히잡을 보는 시각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껏 쌓아 온 말레이의 이미지를 첩첩이 모아본다면 좋은 것들만 아마 한가득이지 않을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체낭 비치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세상의 따스함이 나를 한순간에 휘감고 만다. 부디 이 글에도 내가 느낀 그 감정이 잘 녹아들어야 할 텐데.
서서히 태양이 지글지글.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같다.
시간을 확인하고 보드라운 모래 위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다음 모래가 품은 온기를 느꼈다. 이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수 있기를.
그나저나 이럴 때만 혼자 여행이 아쉬웠다. 바다를 앞에 두고도 그 따뜻한 물을 편하게 즐기지 못 한다는 거.
구름이 천태만변이다.
대체 왜 한국에서는, 아니 서울에서는 저런 구름을 보기가 힘든 걸까?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늘 궁금해하던 것 중 하나다. 해외에만 오면 지금껏 보지 못한 구름을 몰아서 보는 느낌이다. 만져질 것 같은, 감촉까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두툼한 구름들을 보면 떼어서라도 집에 가져가고 싶을 지경이다.
아, 문득 생각났다.
한국에도 저런 구름은 있다.
다만 내가 보지 못 했을 뿐이다. 땅에서 50원이라도 찾을 기세로 고개만 숙이고 걸어 다닌 습관 탓이다.
고민하고 걱정하며 사는 사이 아마 이만큼 멋진 구름들을 수없이 머리 위로 흘려보냈을 거다.
그 사이 오늘의 석양, 엔딩크레딧이 끝이 났다.
양볼 가득 비를 머금은 매서운 구름 덩어리가 가뿐하게 태양을 가려버렸다. 이 풍경이 흑백이라면 저 구름은 필시 연기다. 먼 곳에 있는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사나운 연기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 구름이 장관인지라 차마 자리도 뜨지를 못하겠다. 결국 비라도 쏟을 테면 쏟아 보라는 식으로 끝내 앉아 있었다.
내 옆으로 푸른 어둠이 부드럽게 앉았다.
서서히 저녁이나 먹으러 가볼까.
오늘은 체낭몰에서 봐두었던 올드타운 카페에서 말레이의 첫 끼를 해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