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후에 보이는 것들.
20.05.12
20년 5월, 카카오 코딩 테스트를 이틀 앞두고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만 있는 이 생활이 답답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냥 문제를 풀기 싫었던 거겠지.
19년 12월, 남미 여행을 위한 짐을 싸면서 안 읽을 게 뻔히 보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갔던 책인데, 나름 여유로웠던 시간들을 모두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수다로 바빠 결국 읽지 못하고 그대로 가져왔다. 읽고 나서 보니 여행하면서 읽었다 하더라도 나 또한 여행 중이었기에 큰 감흥 없이 쓱쓱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이 책이 더 나에게 와닿았던 것은 내가 홀로 돌아다니며 느꼈던 어디에도 공유하지 못하고 담아왔던 생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이다. 마냥 행복하던 2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큰 이벤트 없이 여유를 즐기며 한량 같던 시간들, 천천히 가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좋아 비행기 대신 자동차, 자동차 대신 자전거, 자전거 대신 걸어 다니며 고생 속 숨어있던 사람들의 일상을 같이 느꼈던 나날들, 아타카마 사막 하늘 위 끊임없이 반짝이던 은하수를 보며 지구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꼈던 숨 멎을 것 같던 순간들, 모로코에서 동양인 여자애라는 이유로 수 없이 당했던 캣 콜링들, 노르웨이에서 연어 먹고 쓰러졌다 살아난 일들 등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33개국 96 도시. 대략 다녀온 여행기간만 합치면 1년 이 좀 넘는다. 26살의 나이치곤 나름 여행을 즐기는 자칭 방랑자가 되고 싶은 취준생이다. 보통 여행지에선 그 도시에서 꼭 가고 싶은 관광지를 제외하곤 발 이끄는 대로 골목골목 누비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결국 늘 나는 강이나 바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어우러진 경치를 앞에 두고 떨어진 당을 채우며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로컬 펍에 들어가 그 지역의 유명한 맥주 한잔을 마시며 하루 동안 느꼈던 감흥을 정리했다. 이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나의 힐링 방법이다. 덕분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나는 안다.
여행하며 얻은 자산은 한국에서의 보편적인 '사회적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삶에 대한 기준을 돌아보는 시간을 매번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늘 의문을 품었고 아직도 품고 있는 부분이지만 왜 우리는 사회의 눈치를 보고 그 기준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지, 왜 모두가 같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건지.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아도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만족하고 만족 속에서 행복이란 감정을 느낀다면 그 보다 인생에서 더 중요한 건 없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이 우리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달라지게 하진 않지만 분명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고민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충분히 생각할 멋진 장소와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돈 아깝지 않은 인생 수업이지 않을까. 더해서 아주 조금의 자신감까지.
공부하다 말고 추억에 젖어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구석의 외장하드를 찾아 3시간 가까이 뒤적였다. 그 당시에 기록 아닌 기록이라며 남겨 놓은 짧은 메모들을 보며 왜 당시에 그 장소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지금처럼 자세하게 정리해놓지 않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물론 당연하게도 당시엔 여행하느라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자는 나날들의 연속이었겠지.
여행을 다녀와서 그때의 그 감정들을 되새기고자 하는 분들이 계시면 한 번쯤은 가볍게 읽어보기 좋을 에세이이다. 그리고 덕분에 묵혀뒀던 외장하드에서 찾은 몇 장의 사진들을 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