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ent Jan 23. 2023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 무라카미하루키

언젠가 아일라 섬에 가보려고

23.01.22


여유 있는 설 연휴를 즐기고자 짧게 가족들만 보고 내가 못했던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는 시간으로 보내기로 했다. 여러 가지 목표 중엔 와인 한잔으로 졸려하는 내가 와인 한 병 비우기, 그러면서 책 두 권 읽고, 글 두 개 쓰기도 포함이다.


며칠 전 출장 같이 다녀온 임원분께서 바쁘신 와중에 감사하게도 식사 자리를 제안해 주셨는데, 거기서 위스키 이야기를 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보니 얼핏 출장 중에도 이 책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엔 좀 취기가 있어서 인지 더 재밌는 이야기가 많아서인지 흘려 들었나 보다. 이 책을 계기로 위스키에 입문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대체 어떤 책 이길래 위스키에 관심도 없던 사람을 끌리게 만들었는가 싶어 설에 꼭 읽어야겠다 마음먹었다. 결심의 지속력이 짧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내가 또 언제 이 책에 다시 흥미가 돌아올지 모르기에 빨리 행해야 했다.






몇 주 전, 정말 갑자기 출장지에서 먹었던 위스키가 생각났다. 라프로익이었는데, 그때의 분위기와 술 특유의 향이 정말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 일정이 없던 친구와 번개로 만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바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했다. 샷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잔이 되고. 1월엔 성과급이 나오니 괜찮을 거라며 실컷 마시다가 몇 십만 원이 찍힌 영수증을 보고 기겁을 했다. 너무 맛있고 향이 좋은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되어 후회는 전혀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살짝 손이 떨리긴 한다..ㅎㅎ


두 번째로 갔던 바에선 바텐더 분께서 내게 농담 삼아 '피트충'이라며 일반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셨을 때와 피트 위스키를 마셨을 때의 내 반응이 현저히 차이가 난다고 했다. 이런 걸 보면 첫 경험이 참 중요하다. 좋든 싫든 평가의 기준점이 돼버린다. 나는 어쩌다 보니 라프로익이라는 술이 첫 위스키였고, (후에 보니 이는 조금 잔인했지만ㅎ) 생각보다 굉장히 맛있게 마셨었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피트향이 강한 위스키를 찾게 되고 그렇지 않은 술은 약간 밍밍하다고 느끼게 되더라.






나는 주종에 관계없이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라 위스키를 마실 수 있을 거라곤, 심지어 좋아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도 6년을 더 살아왔는데 그런 내가 출장을 계기로 와인과 위스키에 푹 빠져 버렸다. 커피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커피도 그렇고 와인이나 위스키도 그렇고 뭔가 맛이나 향에 따라 천차만별인 액체류(?)에 매력을 느끼나 보다. 특히 위스키가 맛도 좋고, 향도 좋고, 깔끔하고, 생각보다 취기가 늦게 올라오는 것이 나에게 굉장히 잘 맞는 술이란 걸 뒤늦게 알아버렸다.


여담으로 위스키보다 도수가 훨씬 낮은 와인을 마실 때, 맥주를 마실 때 더 빨리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취기를 일으키는 성분이 ‘아세트알데하이드’인데, 알코올 분해 효소(ADH)와 결합하여 알코올이 분해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혈중알코올농도를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친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세트알데하이드’란 친구가 소주에는 굉장히 적게 들어있는데, 맥주나 와인에는 술 자체에 포함된 량이 꽤 있어서 혈중알코올농도가 올라가기 쉽기 때문에 더 빨리 취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거라 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실 굉장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이니 만큼 엄청난 감상평은 없다. 와인을 마시면서 읽어서 그런가 "아 나도 현지에 있는 바에 가서 마시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다.


24살이 되길 며칠 앞두던 2017년 12월 말, 에든버러라는 도시에 있었다. 보통은 해리포터 빠들이 가는 도시인데, 해리포터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 단지 스코틀랜드 어딘가에 가보고 싶어 정하게 된 도시였다. 교환학생 가기 전 당시에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 짧게 영국 여행을 했었는데, 에든버러 캐슬을 구경하고 내려오던 길에 있는 엄청 큰 스카치위스키 체험관을 들렀었다. 왜 이 맛도 없는 술을 그 비싼 돈 주고 마시냐며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에겐 별로 재미도 없던 곳에서 꽤 오래 머물렀던 기억뿐인데, 그 친구는 온 찬장이 위스키로 가득 차 있는 공간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며 테이스팅으로 준 샷을 몇 잔 마시곤 엄청 신나 했었다. 이제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그 친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경험을 가지고 다시 에든버러를 가게 된다면 온갖 시음이란 시음, 구경이란 구경은 다 하면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올 자신이 있다.


피트 위스키들의 산지인 아일라 섬에 가서 꼭 이 책처럼 한량 같은 위스키 투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술을 테마로 여행해 본 것은 유럽에 교환학생으로 있었을 때인데, 당시 맥주에 심각하게 빠져있었던 터라 나라마다, 도시마다 유명한 맥주 양조장은 놓치지 않고 늘 투어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코젤, 필스너, 칼스버그, 하이네켄, 기네스까지 나름 꽤나 진심이었다. 술은 산지에서 마셔야 제 맛이다. 맥주는 내가 증명했고 위스키는 이 책이 증명해 줬다. (다만 와인은 좀 예외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와인은 양조장에서 와인만 마시는 것보단 근처 동네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먹었을 때가 제일이다.) 그러니 꼭 맥주 양조장에서 먹은 코젤에 반했던 것처럼 위스키 양조장에서 꼭 반하고 와야만겠다.



스코틀랜드에 위스키도 마시러 가야 하고, 아이슬란드에 오로라도 보러 가야 하고, 프랑스 남부 바다에서 몸도 지져야 하는데 유럽을 8개월 동안 그렇게 돌아다녔음에도 아직 한참 부족한 나의 유럽 여행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한 번쯤은 퇴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떠나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몰라 / 이다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