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 부도의 날'(스포 많음)

by 라프

모처럼의 휴일,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97년 당시 국민의 85%가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느끼고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97년 IMF 때부터 힘들어졌다고 하죠. 우리 가족 역시 그랬습니다. 아이 셋 중에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린 아이는 첫째인 저였어요. 하지만 선미보다 10살 정도 많은 사촌 오빠와 사촌 언니들이 누렸던 것들에 비하면 제가 받은 혜택은 새발의 피였죠.


국가 부도의 날을 보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과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 미도파 백화점의 담당자가 5억 5원어치의 그릇 납품 계약을 하고 은행에 간 장면

5억 5천만 원어치의 그릇에 해당하는 어음을 종금사(종합금융사)에 가지고 갑니다. 그 어음을 담보로 대출을 받습니다. 대출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네, 요즘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데, 그때 그 시절엔 그랬더군요.


우리 식구도 그 어음 때문에 망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구었던 가족 사업. 특허도 가지고 있어 꽤 튼튼했어요. 영화 속 김혜수가 말했듯이 어쩌면 우리 가족이 하던 회사도 바로 그 ‘건강한 중소기업 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해당 분야에서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니까요. 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과도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금융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이용해 끊임없는 대출을 일으켜 어음을 종잇 조각으로 만들던 소수의 행태로 인해 결국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회적 금융의 혈관이 서서히 막히고 막히다가 결국 터져 버리게 된 것이죠.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환자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에 여러 명의 의사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다양한 방식의 외과 수술을 제안합니다. 위험의 정도는 전부 달랐겠죠. 그중에 한 명은 수술 후유증이 있더라도 모든 장기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자고 제안하고 다른 의사는 다른 장기는 다 죽어도 그중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기 하나만을 살리자고 제안을 합니다. 결국 권력과 힘 그리고 본인의 이익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던 후자의 방식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 후자의 방식을 제안한 의사가 마련한 동문 미팅


한 국가의 경제총리인 그와 한국은행 실무진의 우두머리 그리고 금융권의 최고 국가 책임자는 모여서 한 기업인 아들을 초대합니다. 그에게 현재의 국가 상황을 전달하게 되죠. ‘도대체 나를 왜 부른 거냐?’하는 태도를 보이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 상황을 전달하라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다가 언론에서 국가 부도 사태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자 그제야 아버지에게 그 소식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주인공 유아인과 함께 최후에 웃는 자가 됩니다.


#국가 부도 일주일 전, 국민들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극 중에서 국가 부도 사태에 대해 감지하고 한 달 전부터 계속 한국은행 총재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김혜수는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알려야 한다고 했고, 자신만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경제총리는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말로 철저히 비공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시 그의 말대로 비공개로 진행하게 되죠. 그리고 같은 시간에 평소 현금거래만 하던 그릇을 제조하는 업체의 사장은 당시 가장 큰 백화점이었던 미도파의 납품 담당자에게 5억 5천만 원짜리 어음을 받고 그릇을 납품하는 계약서에 동업자 친구의 말대로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도장을 찍게 됩니다.


미도파 백화점 담당자는 그 어음을 들고 바로 은행으로 가서 대출을 받습니다. 미도파는 국가의 어려운 상황을 감지했고, 그 상황에서 본인들이 챙길 수 있는 이익을 최대한 챙긴 것이죠. 곧 국가 부도가 선언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음을 받은 그릇 가게 사장과 같은 이유로 미도파 앞으로 달려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저 역시 가족 회사를 떠올렸습니다. 부도가 나기 얼마 전에 생에 처음으로 큰 아파트로 내 집 마련을 했던 고모에게 큰아버지가 찾아와 서류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아마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우리 집에도 같은 이유로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때 지나는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도장을 찍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얘기했지만 결국 큰아버지는 도장을 찍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릇 사업을 함께 했던 동업자가 책임을 가지고 처갓집 식구들에게 도움을 구해 대출로 마련한 그 1억 원처럼 말이죠. 그렇게 마련한 돈은 회사의 자금이 흐르는 걸 돕기 위해 어딘가에 투자되었을 것이고, 그 회사는 줄줄이 폐업을 했겠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만들어진 어음은 종이조각이 되었을 겁니다.


그때 국가가 위험한 상황이라고 국민들에게 알렸더라면 고모도 엄마도 그렇게 사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집 한 채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IMF 사태가 정리된 뒤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있지 않았을까요?


#세상의 흐름을 먼저 읽은 유아인, 국가의 무능에 투자하다


종금사에 다니던 유아인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개개인의 사연에서 국가가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죠. 본인이 관리했던 고객들에게 전화를 하고 투자 설명회를 개최합니다. 현재 금융시장과 경제 그리고 수많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얽혀 있는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세밀하게 얽혀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핵폭탄이 터지기 직전인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얼마나 안일하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직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던’ 모든 투자자가 떠난 뒤, 그중 두 명의 투자자만이 돌아와 유아인의 생각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하죠.


달러를 사고, 주식을 삽니다. 곧 시세에 비해 가격이 급락하게 될 아파트를 왕창 사들일 계획까지 세우고 유아인은 얘기합니다.


인생을 바꿀 타이밍입니다.


맞아요. 국민 90%의 인생을 바꾼 아주 중요한 타이밍이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85%의 중산층은 몰락했고, 정보를 가졌거나, 그 시장의 흐름을 재빠르게 읽은 5%에게는 그들이 가진 자산을 엄청나게 불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지금도 얘기합니다.


그때는 정말 내가 집이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살게 될지 상상도 못 했어


결혼 전 서울에서 살던 엄마는 아이들 책을 팔면서 공무원 한 달 월급이 30만 원이던 시절에 하루에 10만 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구에 살던 지인의 소개로 소위 ‘부잣집 아들’과 맞선을 보고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아주 잘 살았죠.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요.


# 한강대교에서 뛰어내린 그 사람


국가부도의 날 마지막 장면에 ‘IMF 가 있었던 해에 작년보다 자살률이 42% 늘었다’고 나옵니다. 부자로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게 된 스스로가 견디기 어려웠던 사람, 모든 걸 다 바쳐 키워놓은 회사를 하루아침에 잃은 사람, 그리고 그 회사를 살리기 위해 주변의 모든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고 돈을 빌려 결국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 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싹 다 갈아엎을 절호의 기회야

IMF의 지원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때에 경제부 총리는 '꼭 이렇게 해야 할까요?’하고 묻는 금융실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노조 애들이 저렇게 설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이 대한민국 판을 완전히 새롭게 갈아엎을 수 있는 다시 오지 못할 절호의 기회야.


네. 그래서 그는 중소기업은 다 죽이고 대기업만을 살리고, 정규직은 줄이고 비정규직으로 전환해 고용의 유연성과 실업률을 높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새판을 짜기 위해 IMF의 독소조항을 모두 받아들이는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죠.


영화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1천억의 부채가 있는 상황에서 국가 부도를 맞이했고, 자본을 가진 이들이 대한민국의 많은 자산을 떨이로 다 주워갈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모았던 수많은 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고 말이죠.


이 궁금증은 영화의 마지막 크레디트에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22억 달러가 모였고 기업의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

그걸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야. 그럼 그때 금 모으기에 금 보낸 사람은 그때 부채를 갚아준 회사에 혹은 상황을 그 지경까지 만든 국가에 손해 배상이나 투자금액 회수든 뭐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물론 십여 년도 더 지난 일이고 너무나 큰 일이기 때문에 과연 소송이 가능할까 싶지만 한번 꼭 진행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 코로나 19 시대를 비추어 보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IMF가 왜 우리에게 왔는지, 그 후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코로나 19를 대하는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되더라고요. 현재의 상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던 IMF 당시, 그리고 매일매일 코로나 19 확진자와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고 관련 정보를 모든 국민에게 알려주고 있는 현재. 그로 인해 전 국민이 어딜 가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있는 코로나 19 이후의 모습.


국가 그리고 정부가 어떤 모습일 때 국민이 더욱 신뢰할 수 있는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영화는 그 판단을 하기에 적절한 참고자료가 될 거라 믿습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아직 보지 않았다면, 한 번 꼭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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