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의 한계를 물길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조카가 대신 전하는 삼촌의 에세이
그는 16살에 화방에 취직해 동양화를 가까이하며 화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교 대신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결핍을 그림으로 극복하려고 시작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온지 44년째다.
도중에 그림 레슨을 계속 받기 어려워져 붓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더 많이 만져야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덕분에 그의 집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하다.
그에게 그림이 어떤 의미이길래 몸도 마음도 어느 것도 여의치 않은 데도, 미련을 버리고 밖으로 나아갈 생각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리고만 있을까.
액자에 보관된 형태도 아닌, 핀으로 고정된 그림이 벽 곳곳에 붙여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그는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그거 못 나온 건데..'
잘못된 점을 캐치하고 수정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그림을 붙여놓았다. 수시로 보면서 또는 언뜻언뜻 보게 되는 그것들의 형태가 처음의 구상이나 스케치와 다른 점이 보인다면, 더 효과가 좋은 부분들을 체크해서 다음에 더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며 번지는 조화가 우연이 아닌 작가 정신으로 이끄어 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 지금 수련의 목표일 뿐이다.
삼촌은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의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인 것 같다. 비록 완성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집 안에 더 이상 그림을 붙일 구석이 없을지라도 그 마음에 찝찝함은 덜 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삼촌과 같은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대면하고 수정할 수 있는 용기와 대상으로 두고 과몰입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근육 말이다.
종이와 먹물이 변하는 모습
종이에 물길이 스미는 것
그 자체로 신비롭고
내가 행하는 자체가
도취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동양화는 사실 붓 그 자체로 멋있는 장르다. 우리 문화에서는 '필'이라고 말하는데, 동양화에는 붓을 쓸어 올려서 물길을 넣는 '필'의 멋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서양화는 붓으로 칠하는 예술이라면, 동양화는 물길을 옮기는 예술이다. 그 물길에 조화가 있다는 게 동양화의 멋이라고 느낀다.
종이와 먹물이 변하는 모습, 종이에 물길이 스미는 것 그 자체로 신비롭고 내가 행하는 자체가 도취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어떻게 보면 나한텐 다른 세계가 필요해서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정신세계 같은 거랄까
솔직하게 말하면, 도피가 아니고 허세다. 왜냐면 여건도 안 되는데도 억지로 하려고 놓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게 가진 것이 없으니깐 내 멋이라도 갖추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나이 먹어서 할 줄 아는 게 그림 밖에 없는 것도 지금까지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게 제일 빠르고 제일 쉽다.
삼촌은 과연 언제까지 자기 만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꿀떡꿀떡 가쁘게 삼키는 숨이며 서있는 모양새도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그는 내일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