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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클베리 Aug 03. 2022

서점마실

#취미생활 #속박과 자유 #대형서점 #서점마실 #개발자 수필

 서점에서 책 구경하길 좋아한다. 광화문이나 종로, 강남에 있는 대형서점에서라면 7~8시간도 거뜬하다. 

느지막이 출근해 열한 시 반만 돼도 엉덩이는 들썩들썩 점심으로 뭘 먹어야 그날 오후 내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에 하던 일조차 곧잘 멈추곤 하지만 서점에 가면 하루 종일 스마트폰도 가방에 처박아 두고는 이리저리 구경 다니느라 배고픈 줄 모른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신경 쓰여도 두어 시간은 더 버티겠네 생각하며 몸이 눈물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릴 때쯤 되어서야 '거 좀 참지 그걸 못 참냐' 그러면서 서점을 나선다. 뚜렷한 행위의 연속성이랄 것도 없이 그저 서성인 것뿐이면서.. 괜한 아쉬움에 시계 한 번 봤다 막 나선 회전문 한 번 더 쳐다본다. 


 어쩌면 내 취미는 사진이나 드로잉이 아니라 진짜로는 '서점마실'인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들로 인해 지금까진 취미로 인정할 수 없었지만 요즘 들어 생각해보니 기준을 좀 바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가 아빠인데..' 하는 생각을 몇 년 하고 나니 더 나은 사람이 된 거라 믿고 싶어서 인 듯싶다.


 그 기준이란 것도 뭐 별다른 건 아니었다. 그저 '취미란에 이걸 써도 되겠다' 싶은 거면 되었는데 때론 엄격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 성숙하지 못한 내 관념상의 허용여부였달까. 


 그렇다고 지금은 내가 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읽어볼 사람들을 덜 신경 쓰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이젠 그냥 누가 보든 취미가 뭐냐 물어보든 '서점마실'이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뿐이다.




 공군 중위로 전역을 앞둔 2003년 가을 모 제약회사에 회장님 수행비서 겸 기획실 직원으로 지원하면서 난생처음 이력서라는 걸 썼다. 요즘은 딱히 취미란이 있다기보다 자기소개하는 부분에 넣기도 하고 빼도 되는 선택사항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력서의 폼이란 게 회사마다 비슷해서 집주소, 학력사항, 자격증, 가족관계, 취미, 군 경력, 일 경력, 자기소개서 등 주어진 공란을 채우지 않으면 뭔가 불성실한 기입이 되어버리는 그런 느낌이라 '취미'란에 몇 글자 채워 넣는 일이 나에겐 꽤 까다롭게 느껴졌었다. 


 그동안 내 이력서의 '취미'란에 썼던 것들을 다시 보니 대략 이렇다. 

여행 -> 영화감상 -> 스타크래프트 -> 여행 -> 사진 -> 드로잉 -> 수채화 -> 사진, 드로잉


 '서점마실'을 좋아하니 '독서'가 내 삶 어디 한 구석엔 취미로 쓰여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한편으론 코미디 같아 웃음이 나지만 그래도 진정성 있게 이력서를 적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하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서점마실'가서 책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거니까.


 나랑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을지 모를 어떤 이는 책 냄새가 그렇게 좋아서 서점에 간다 그러고 또 어떤 이는 서점에서 여유를 느낀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난 그냥 이 책 저책 구경하며 어딜 가든 자유로운 서점이 편안하다. 그렇게 많은 새 책들이 사방 천지에 쌓여 있으니 호쩍호쩍 흥분도 되고 말이다. 


 이따금 서점에서 하루 종일 있다간 아이들 잠잘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 날 보며 책 읽는 걸 참 좋아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해 줄 아내에겐 늘 송구스런 마음이다. 


 책을 읽지 않으니 그 오랜 시간 서다니면서 의자나 바닥에 앉질 않는다. 그저 나설 때쯤 시계를 보고는 '이놈의 시간은 뭐 했다고 이리 빨리 지나가나' 그런다. 허리가 아픈 것도 배고픈 것도 참고 있었으면서,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는 걸 책 구경하는 새 지나가버린 시간 탓을 한다.  


 누구는 뭐 그리 갈 때마다 구경할 책이 많냐 하지만 어찌 된 게 갈 때마다 집어 들고 제목이라도 읽어줘야 할 것 같은 새 책들이 계속 보이는 걸 어쩌라고.


 


 여행이 취미인 사람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인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자유'를 갈망한다는 건 여행하지 않는 지금 무언가로부터 속박당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나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여행하든 상관없었고 외설이든 예술이든 어떤 영활 보든 안보는 것보단 나았다. 이기든 지든 삼일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며 게임을 하던 것도, 카메라를 들쳐 메고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나 별 시덥잖은 빛 한 조각에 셔터를 눌러대던 것도, 연필이나 물감을 찍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던 시간조차도 하얀 도화지 안에서 만큼은 나를 제약하는 그 무언가를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된 것도 어찌 보면 그 속박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경영학과를 나와 취직이란 것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때 직장이란 것은 아니, 경영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하게 되는 일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강자였던 적이 없던 나에게 스트레스였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술을 권해도 하나님 방패가 아니면 응당 마셔야 했고, 재미없는 보고서는 왜 그리 많으며, 전혀 발전적일 것 같지 않은 일들을 해내기 위해 정장을 입은 채 이른 아침 정시 출근을 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운동화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늦은 아침 빵쪼가릴 물고 맘대로 출근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쪽쪽 빨다간 일하고 싶지 않은 오후엔 여기저기 산책하다 들어오고 싶었던 나에겐 개발자가 딱이었다. 


 근데 그렇게 10년을 넘게 살아보니 세상 연약한 인간에겐 이것도 속박이더라.


 지인이 결혼을 해도 마땅히 입고 갈 복장의 구색도 맞추기 힘들고, 빵쪼가리 햄버거를 자주 먹다보니 배는 늘 더부룩 점점 볼록해지고 아침 늦게 출근하다보니 아침형 인간이었던 나의 모습은 아주 먼 옛날얘기, 늦게 시작한 하루하루는 야근의 연속이 되고 그러다보니 늘 밤 늦게야 돋는 자유의 감성에 새벽까지 쓸데없이 인터넷을 방황하다 갖게 된 만성 다크서클은 세수를 여러번 해도 옅어질 기미가 안보였다. 지극히 평화로와야 할 오후의 산책은 배에 낀 바닐라를 떼어내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빼먹으면 위기감 만땅인 마이너스 루틴이 되었고 결국 온갖 노력을 통해 얻게 된 개발자의 삶 역시 내가 원하던 자유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간다. '서점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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