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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두 Sep 16. 2022

모란역 그 사람

[밥벌이를 위한 장전(裝塡)] (1) 밥

분당선을 타고 모란역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눈에 들어온 건 한 남자였다. 남자는 서둘러 계단을 오르더니 개찰구를 순식간에 빠져 나갔다. 50대 언저리로 보이는 그는 어깨에 걸친 국방색 점퍼에서 아마도 본래는 흰 색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운동화에 이르기까지 온통 잿빛이었다. 소매의 카모플라쥬 무늬에 걸맞게 위장에 최적화된 것 같았다. 


우리의 목적지가 왠지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초행길이라 켜두었던 지도 어플을 끄고 그를 쫓아갔다. 그는 익숙한 길인 듯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횡단보도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빨간불에 여의치 않고 주위를 한두 번 살피고는 길 건너로 넘어갔다. 나는 그를 놓칠까봐 마음을 졸이며 신호등을 노려봤다. 그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호가 바뀌었다. 


남자의 꽁무니를 따라간 지 10분쯤 되었을 때 그의 걸음이 한 성당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쭉 늘어선 행렬 맨 끝에 섰다. 조금 지나자 그의 뒤로 줄이 이어졌다. 마냥 늘어나기만 할 것 같던 줄은 그곳에 도착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후 4시 30쯤 남자의 차례가 왔다. 


“웬일로 좀 늦으셨네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중년 여성이 노란색 봉투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꾸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성당 앞에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을 지나 주차장 한켠에 자리를 잡은 그는 봉투에서 플라스틱 용기들을 꺼내 식사를 시작했다. 메인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직 음식이 남아 있는 도시락통을 다시 봉투에 담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올 때와는 달리 느긋했다. 


남자는 매일 밥을 먹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그가 처음 멈춰서는 곳은 종로의 탑골공원이다. 8시쯤 줄에 들어가면 10시 반쯤 배식을 받는다. 식사를 마치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지하철에 오른다. 종로 3가에서 왕십리를 지나 모란역까지 2시 전에 도착하면 그날 일정은 얼추 끝난다. 


성남 ‘안나의 집’은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저녁 무료급식소를 운영한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에는 코로나 사태로 서울의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거나 작은 주먹밥으로 급식을 대체하는 바람에 이곳으로 오는 사람이 늘었다. 배식은 4시부터지만 2시부터 줄을 서야 하는 이유다. 매일 500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하지만 못 먹는 사람이 꼭 있다. 오늘 그가 신호등도 무시할 만큼 왜 그리도 서둘러야 했는지 알 것 같다. 


역에 다다르자 어버이날을 맞아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한 아름 든 사람들로 붐볐다. 남자의 손에 들린 노란 봉투에서 봉사자들이 넣어 둔 분홍색 꽃 한 송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맨 몸의 카네이션이었다. 어쩌면 그가 하루에 5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면서까지 원정을 떠나는 이유가 비단 허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꽃에 눈이 팔린 사이 남자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계단을 지나 개찰구를 통과했다. 밀려드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간 그의 뒷모습이 희미해졌다. 나는 반대편 개찰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2020.05.08 성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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