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퐁당 Apr 19. 2024

살아갈 이유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질문, 우리는 왜 살까

생일 축하 노래 중에 장난스럽게 뒤틀린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이렇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어차피 죽을 거 왜 태어났니.”  

태어난 이유를 알고 태어나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라고 사는 이유를 알 수가 있을까. 노래 가사 말처럼 모든 생명은 죽음이라는 끝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이며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답 없는 질문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질문.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노년의 삶을 지켜보게 된 나로서는 특히나 이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기에, 나만의 답이라도 내리고 싶었다.


수많은 생각 끝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묻는 말에 대한 나의 잠정적인 답은 ‘행복하게 삶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창조주는 창조물인 생명이 그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지켜보고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엄마를 바라보며 하게 된 생각에서 이어진 생각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 후 내가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던 이유는 엄마를 사랑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 돌봄에 지친 엄마를 쉬게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할머니 돌봄을 돕고, 돕는데도 엄마는 물을 아무리 부어도 물이 새어 나오는 밑 빠진 독처럼 지쳐있었다. 이 정도 내가 노력하며 돌봄의 짐을 덜었으면 좀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엄마는 안 행복할까?”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똑같은 질문이 나에게 울려 퍼졌다. “왜 너는 안 행복하니?”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줘야 네가 행복해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적혀있다. 자기 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하나님.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은 내가 엄마를 보며 엄마의 행복만을 바랐던 것과 똑같이 나의 행복만을 바라며 나를 보고 있으시겠구나.


삶의 이유가 행복하게 삶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를 보면서 얻을 수 없는, 현재에만 있는 감정이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은 지금에 충실하며 사는 것 같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눈을 본 아이들과 어른들의 반응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우와 눈 온다! 예쁘게 펑펑 온다!”하고 즐거워하고, 어른들은 “아이고 길도 미끄럽고 이따 차 막히겠네.”하고 걱정한다. 아이들의 눈에는 흰색 눈만 보이고 어른들의 눈에는 도로 위 검은색 눈도 보이는 것이다.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인지 동심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상실인지, 눈이 내리고 있는 그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 검은 눈을 어른들은 본다. 그렇게 어른이 된 우리는 눈 내리는 순간을 마냥 즐기지 못한다. 이 단순한 시각의 차이는 우리를 행복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버린다. 미래의 나를 걱정하다 오늘의 감사를 잊어버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 내 마음을 참고 살다 보니 분명 내가 선택한 것들에도 나를 위한 일들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눈 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검은 눈을 걱정하느라 하얀 눈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겠다고 함박눈 하나를 마음에 담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뭐 때문에 사냐고 물으셨다. "행복해지려고 살죠." 그러자 할머니는 "잘 아네, 사람들한테 뭐 때문에 사는지 물어봐봐, 다 다른 거 얘기해도 결국 비슷할걸. 뭐 때문에 사는지만 안 까먹으면 잘 살 거야."라고 하신다. 그것참 맞는 말이다. 행복해지려고 사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그 단순한 이유를 잊고 살아가는 것만 같다. 이제라도 나에게 주어진 이 찰나의 시간을 나답게, 행복하게 사용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물론 매 순간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우리는 매번 시간의 유한함을 잊고 무료한 일상이라며 일상의 소중함을 까먹기도 하지만. 월차라며 할머니를 모시고 미술관에 다녀오자고 제안해 준 남편 덕분에 동양화 전시를 보고 왔다. 언뜻 보면 풍경만 있는 풍경화 같았는데 아주 작은 사람이 그 풍경 속에 있었다. 한국의 옛 그림들은 인간이 거대한 세상 속 작은 존재임을 전하고 있었다. 화면 한가득 내 모습을 담는 셀카처럼 인간이 주인공 행세를 하는 요즘이지만 인간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먼지가 거창한 존재가 된다고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우리의 유한한 삶은 얼마나 짧은지 다시금 깨닫는다. 매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도 모자란 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그랬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