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유네스코 문화유산 #441)
중국 섬서성의 리산(驪山)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BC 259~BC 210)의 무덤이다. 진시황릉은 기원전 221년에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룩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능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진시황릉은 서안(西安)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있으며, 43m 높이의 거대한 봉분(아래 왼쪽 사진의 산 같이 보이는 것) 은 지금도 주요 역사적 건조물이다. 능은 동서남북 기본 방위에 대응하는 네 개 각각에 문이 달린 최초의 정방형 담장 안에 지어졌다. 그리고 이 정방형 담장은 다시 남북으로 뻗은 더 큰 장방형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다. 영묘의 거대한 구조물은 사라져 버렸으며, 오직 꼭대기가 떨어져 나간 피라미드와 닮은 나무 둔덕만이 350㎡의 토대 위에 남아 있다.
진시황은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점술가를 시켜 리산의 산자락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고르도록 했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가 된 후, 그의 묘는 규모가 확장되었다. 전국에서 7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차출되어 거대한 고분 안에 지하도시를 건설했고, 결국 노동자들이 무덤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같이 순장되었다.
1974년에 발견이 시작된황릉은아직 다발굴되지는않았다.지하묘는무덤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 무덤을 열게 되면부장품이 다 녹아내리는 수은기체가 가득 차 있어서 아직 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대신 지하묘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마용(兵馬俑; warrior & horse terracotta) 위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병마용은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군인 모형이다. 왕이나 황제가 죽을 경우, 관련된 처첩과 군사들은 무덤에 같이 살아있는 체로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진나라는 통일을 이루긴 하였으나, 지방호족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이 곳곳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 군사들을 순장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커서 흙으로 구워 만든 병사 모형들을 무덤에 넣게 된 것이다. 약 8천여 개의 인형들은 실제 병사들처럼 창, 검, 도끼, 활과 화살 등의 물건을 들고 있으며, 말과 수레 모형도 같이 발견되었다.
현재 발굴된 병마용 갱도는 총 3호 갱도까지 있다.
처음으로 발견된 곳은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병사 모형을 우연히 발견했고,이때 발굴된 곳이 1호 갱이다.
[1호 갱]
측면을 보호하는 궁수들과 함께 전투 대열로 서 있는 보병대와 기병대의 병사 1,087명이 나왔다. 길이 230m에 이르는 이 하나의 갱에만 하더라도 6천여 개의 병마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주변은 박물관으로 보호되고 있다.
[2, 3호갱]
두 개의 다른 갱은 1호 갱의 바로 북쪽에서 발견되었고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호 갱에서는 병사 1,500명과 수레 및 말이, 3호 갱에서는 지휘관과 고관 68명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나왔다. 이 갱들은 임시로 다시 메워졌고 갱에서 꺼낸 물건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기타]
그 밖에 봉분의 서쪽 비탈면에서는청동으로 만들어진 장례용 수레 두 대가 발견되었다.
진의 수도였던 함안(지금의 서안)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통합(진시황은 전 중국에 통일된 문자, 화폐, 도량형을 도입하고자 했다)과 사방 어디서든 침략할 수 있는 적들로부터 보호(군대는 무덤에서 바깥을 향하고 있는 죽은 황제의 얼굴을 지키고 있다)하기를 바랐던 중국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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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섬서성)의 국수 요리인 '뱡뱡면'은 면발의 폭이 벨트처럼 넓고 매운 고추를 얹어먹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뱡뱡면의 ‘뱡’ 자는 무려 57획(그림)이나 돼 중국에서 가장 복잡한 한자로도 유명하다. 표준어 사전에는 없는 글인 데다 섬서성 일대에서만 ‘면의 폭이 넓은 국수’란 의미로 쓰여왔다. 뱡뱡면은 두께와 길이로 인해 벨트와 유사하다고 묘사되며, '섬서성의10가지 괴이한 것 (陝西十大怪)' 중 하나로 꼽힌다.
'뱡’ 자의 유래는 어느 한량이 이 지역을 지나가고 있는데 식당에서 손으로 면을 뽑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뱡뱡’하는 소리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 한량은 식당을 찾아가서 면 요리를 실컷 먹고 나서 밥값 대신 붓을 꺼내 국수의 이름을' 뱡뱡면'이라 지어줬다고 한다.어쨌든, 섬서성의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매운 붉은 고추를 위에 얹은 뱡뱡면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었으나, 현재는 특이한 이름으로 인하여 널리 유행하여섬서성의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