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라는 단어를 종종 마주친다. 한 사물의 색깔이나 사람의 성격 혹은 어떤 상황을 묘사할 때 꽤 자주 활용되는 모양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걔는 나랑 결이 안 맞아.” “내가 생각하는 건 너랑 결이 좀 다른 거 같아.” “여긴 의정부나 장충동 계열과는 다른 결의 평냉집 같아” 결은 말할 때도 많이 쓰이지만 읽고 쓰는 일이 일상인 내게는 글을 볼 때 더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신간 제목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당장 몇 개를 나열할 수 있지만, 누군가 공을 들여 내놓은 결과물을 도매급으로 묶는 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나의 유일한 글벗인 여자친구와 이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어느 시기마다 많이 쓰이는 말들이 꼭 있다면서, 결 또한 지금 널리 쓰이는 말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했다. 근래 자주 쓰이는 ‘톺아보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무언가 단언하길 싫어하는 여자친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걷어낸다면, 그러니까 내 식대로 딱 잘라 말하면 결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는 거다. 나는 몰라도 그가 그렇다고 한다면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여자친구와 나의 독서 방식은 다르다. 한마디로 결이 다르다. 한 권을 다 보지 못하면 웬만해선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않는 내 성정에 반해, 그는 한 번에 열 몇 권이 넘는 책을 동시에 탐독한다. 그런 그가 당장 읽고 있는 수많은 책에서 ‘결’이라는 단어를 목격했다고 실토했다. 우리는 이 사실이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상의 비밀(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착각하면서 살 필요도 있다.)인 듯하여 아주 내밀하게 소곤댔다.
어쨌거나 결이라는 말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제법 진진한 구석이 있다. 매력적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맛이 있다. 무엇보다 이 말을 쓸 때면 세심하고 촘촘하게 대상을 구별할 줄 아는, 마치 교양이 넉넉한 사람이 된 듯해 어깨를 추썩이게 된다. 비평가처럼 말이다. 이 때문인가. 나 역시 말의 유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장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홍세화 저자의 ‘결: 거칢에 대하여’를 제목에 이끌려 사고 말았다. 산 지 여섯 달이 넘도록 아직 서문도 채 읽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떤 말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바는 말에 담긴 의미를 사람들이 욕망해서다. 욕망한다는 것은 당대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도 마찬가지다. 널리 쓰이지만 정작 현실과는 괴리돼 있다.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이상향 같다. 사람에겐 누구나 결이 있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진리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만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이 살아있는’ 사회를 겪어본 적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일방통행 혹은 끽해야 이차선 도로에서 편협한 해방감을 누리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유형화 당했고, 때로는 스스로 자처해 자신을 유형화했다. “그 나이 먹고”라는 말이 두려워 자아를 옭아매야 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조잡한 언어에, 치열하게 골몰하지 않은 흐릿한 조언에, 호방한 척하는 편협하고도 무감한 태도에 기꺼이 굴복해야만 했다. 때로는 인생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하다. 울화가 치민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억울하기보단 타인의 울분을 대리하는 것에 가깝다. 지인이라는 핑계로 다른 삶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를 목도하면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분하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상황에 이입하게 된다.
얼마 전 누군가가 ‘불알친구’를 빗대며 본인의 친구가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평가하는 모습을 봤다. 삼십 대 중반이 되도록 공무원 시험만 들입다 판다는 요지다. 그러니까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난 그가 말하는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사람’을 전혀 모른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상대방이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불알친구’라는 사람이 이렇게도 나른한 표정으로 고기 해체하듯 절단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놀라웠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을 다녔다고 했다. 그게 그가 참견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고쳐먹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포기할 때를 모르고 바보같이 계속 덤벼드는 게 딱하다면서. 나는 학창시절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은 이제 둘의 가교를 온전히 이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했다. ‘때’를 운운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스무 살이 된 시점부터 시간은 급격히 상대적으로 흘렀고 그런 탓에 둘이 살아낸 인생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고 말이다. 물론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예상은 했다만.
우리는 살면서 ‘정상’이라는 단어를 무수히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말이 무척이나 디스토피아스럽다고 여긴다. 거기엔 생명력이 없고 건조한 껍데기만 있기 때문이다. 정상이라는 말 뒤에 각자의 상황은 도태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모태솔로라는 말로 연애하지 않는 사람을 희화화하고, 남성 동성애자들을 똥꼬충이라 힐난하고,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정신머리를 운운하고, 학자금대출로 허덕이는 이를 앞에 두고 삼십대 초반에 이 정도 돈은 모아야 정상이라 단정 지으며, 알바를 하면서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는 채로 음악에 매진하는 사람에게 내 자식이었으면 가만 안 뒀다는 이야기를 농담이랍시고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 크고 작은 정상의 굴레가 삶을 속박하고 무수히 많은 결을 한 보따리 안에 꿰맨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헐겁다. 온갖 곳이 비어있다. 그래서 나는 저마다 다른 결의 사람들이 이 사회를 빽빽하게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타인의 삶을 관조하려는 시도를 감히 할 수 없게끔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삶의 분포가 편평해지길 소망한다. ‘보통의 삶’이라는 문장이 안온하게 포장되는 시대다. 도대체가, 평균을 구가하는 시대의 막은 언제 저물어 내릴까. 과연 우리는 언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은 포장지를 벗고 진실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아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