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2학년 즈음이었을까. 그러니까, 미국으로 이민 간 게 햇수로 6~7년 정도 되던 즈음. 갑자기 일상적 말하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짧은 대답이나 추임새 정도는 괜찮은데, 어떤 현상에 대해 세 문장 이상으로 길게 얘기하려면 갑자기 버벅대는. 영어로도 마찬가지였고, 한국어로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국어는 한국어인데 집에서 가족들끼리 있을 때 빼고는 24시간 영어를 쓰고 있자니 생긴 일종의 과도기였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말하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글쓰기가 더 편했다.
그런데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갖고 나서 나는 직업 때문에라도 말하기를 무척 잘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역하는 과정에서 내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일정을 조율하고, 통번역 범위를 체크하고, 여러 표현과 용어들에 대한 합의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말하기는 꼭 필요했다. 그래서 아주 비싼 돈을 내고 서울의 한 스피치 강의를 주기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적은 비용은 아니었다. 8주 코스에 약 60만 원 이상. 비싼 돈을 써가며 말하기를 배운 소감은 이러하다:
(1) 내 원래 목소리(key tone)는 내가 평소 쓰는 목소리보다 낮다. 훠어얼씬 낮다.
외향적인 외국인 친구들과 자라서인지 텐션을 높여서 높은 목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내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 치고는 꽤나 낮은 중저음톤이라는 말을 들었다. 원진아 배우 정도로 낮은 톤이 얼추 내 목소리 range와 비슷하다. 다만 워낙 높은 톤을 쓰고 다녀서 이 톤으로 연습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좀 어색하다. 좀 더 다양한 톤 앤 매너로 '요리'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2) 종결 어미는 내리는 게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앞에 1번과 비슷한 맥락인데, 그동안 나는 좀 더 밝고 외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종결 어미를 (~~ 다) 높이면서 살았던 것이다ㅠ 그렇지만 한국어는 말끝을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게 훨씬 프로페셔널하고 성숙하게 들린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끝을 '흐리는 것'과 '내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3) 스피치에서 내용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건 비언어적인 요소들이다.
스피치 수업을 들으면서 우선 위안을 삼았던 포인트는 생각보다 나는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재능은 있다는 것. 다소 낙담했던 포인트는 그 외 모든 것 ㅎㅎㅎㅎ 쉽게 말해 약간 AI 프레젠터 같은 느낌이 매우 많이 난다. 실제로 내 모습을 녹화해서 보면 표정과 목소리톤에 변화가 거의 없어서 마치 로봇이 말하는 것 같다 ㅎ 앞으로 분발해야 할 포인트 +10...
저렴하지 않은 수강료에 내 지갑은 상당히 얇아졌지만 그래도 꽤 만족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이런 전달력 측면도 신경을 써야 할 수밖에... 대체 언제 좋아지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확실히 예전 녹음본 들어보면 전보다는 목소리가 단단해지고 호흡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주 천천히라도 발전하는 내가 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