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중앙일보> 2024.04.01자 발췌
올해 초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표현도 다시 살펴보아야겠다.
우리가 익숙한 용어를 사용할 때 거기에 딸려있는 고정관념을 그대로 가져올 위험이 있다.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과학 용어를 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이 노상 사용하는 '입자'(粒子)라는 단어를 보자. 영어로는 'particle'인데 그 말에는 조그맣고 단단한 알갱이라는 함의가 있고, 그래서 한문의 낟알 립(粒) 자를 써서 번역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서부터 17~19세기 물리학의 고전역학까지 모든 이론은 그러한 입자를 다루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물질의 기본적 구성물들은 그런 알갱이가 아니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전자와 같은 소립자는 날카롭게 정의된 모양이 없을 뿐 아니라 운동량과 위치도 동시에 정확히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정설이다. '입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곡식 알갱이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이런 신비한 양자역학적 존재들을 언급할 때 계속 '입자'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들을 때 그 의미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조차도 입자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히 고전적인 알갱이의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 생물학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흔히 볼 수 있다. (중략)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나 '유전'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이 생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도구다. 그러나 말 한마디마다 숨겨진 고정관념이 따라다닌다. 생각 없이 쓰는 언어는 참되고 유연한 생각을 막는 감옥이 될 수 있다. 거기에서 필요할 때마다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적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