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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프리터 Aug 04. 2024

왜 통역사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팩션

남에게 보이는 직업을 갈망했었다.


걸프전 발발에 방송 생중계를 진행한 대한민국 정부 기관 제1호 임종령 동시통역사. 그래미 시상식 통역을 진행한 안현모 국제회의 통역사. 그들의 자리에 나도 언젠가는 설 수 있겠지,라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통번역대학원 과정을 밟아 통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며 깨달은 점은 통역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형형색색의 복장 속에서 최대한 튀지 않게 검은 정장을 갖춰 입어야 했다. 내 존재가 사진에 담기지 않도록 뒤쪽으로 숨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존재를 뜻했다. 나는 파파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상무님들은 나를 옆에 두고 최신 핸드폰의 AI 통역 기능이 얼마나 잘 빠졌는지에 대한 잡담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하시곤 했다. 보이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은 사람. 그 사실이 괴로워 잠시 일을 그만두고 자원봉사로만 통역 일을 했었다.     


희선 씨를 만나게 된 것도 합정역 홀트아동복지회에 통역사로 자원봉사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희선 씨가 20년 전 5개월간 돌봤던 ‘위탁 아들’ 영수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희선 씨는 5개월 된 수가 얼마나 울던지 한밤 중에도 업어가며 달랬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설레며 머리를 정돈하는 희선 씨를 보자 걱정이 되었다. ‘영수라는 그 친구는 희선 씨 기억도 못할 텐데...’ 돌려받지 못할 관심과 사랑을 준 희선 씨가 대단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동병상련의 느낌이 들어 안쓰럽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호리호리하게 키가 커버린 영수, 아니 필드가 나타났다. 희선 씨가 벌떡 일어나 필드를 품에 안았다. 필드는 낯선 아줌마의 포옹에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한숨을 쉬며 노트와 펜을 꺼냈다. “어쩜 이렇게 곱게 잘 자랐니?” “땡큐...” “너를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 “미투....” 5개월 간 영수가 울지 않게 달래고, 어르고, 먹이고, 재웠던 희선 씨는 할 말이 참 많았다. 그에 비해 그 시절이 당연히 기억날 리 없는 영수, 아니, 필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필드의 단답을 통역하며 나까지 볼이 붉어졌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지만 희선 씨는 개의치 않고 필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저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서 감사할 뿐이야.”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양부모와의 여행 일정이 남아있었기에 필드는 다시 자리를 떠야 했다. 아쉬운 인사를 뒤로하며 희선 씨가 고개를 떨구던 그때, 필드가 나에게 다가와 ‘땡큐’가 한국어로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희선 씨에게 “엄마,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필드가 아기 때 했던 첫마디가 바로 ‘엄마’라고 했다. 필드에게 희선 씨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리로, 마음으로 느껴지는 존재였다. 통역을 전해 듣는 희선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통역이 끝났을 때, 익숙하게 조용히 떠나려던 나를 안아준 것은 다름 아닌 희선 씨였다. “오늘 통역해 주셔서 고마워요. 제 귀와 목소리가 되어주셨어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희선 씨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자꾸만 필드의 또박또박한 ‘엄마’ 발음과 희선 씨의 따뜻한 품이 떠올랐다. 그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어떤 것들은 무형의 존재라도 상관없었다. 보이지 않되, 언제든 들릴 테니. 느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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