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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Oct 23. 2022

아프리카 그림일기

프롤로그

‘여긴 어디지’


아직 어두울  의식 깨어난다.  끝의 세포들이 강아지의 까만 코처럼 요리조리 움직여 공기를 감지한다. 차갑거나 후덥지근한 타국의 공기. 어둡다. 나는 아직 눈을 감고 있구나. 오늘도 4 50분쯤이겠지.

여긴 어디지, 어디더라. 까만 허공에 낯선 음절로 조합된 지명을 떠올리면 (내가 짐바브웨에 있다고..?) 그 허공에 누워있는 현실이 믿을 수 없어지다가 곧 한국 영등포에서의 삶이 지도 위의 점처럼 멀게 멀게 느껴졌다. 어제를 살아내고 피곤한 몸은 지금 이 자리에 차악 가라앉아버렸는데, 의식만이 나에게 여긴 어디지, 야, 너 낯선 곳에 와 있어, 일깨워준다. 누워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니거나, 앉은 채로, 쪼그려 무릎을 감싼 채로, 어쨌거나 하루에 한 번씩은 잠에서 깼다. 눈을 떠 시계를 보면 5시가 되기 전이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햇수로 5년, 곧 6년이 된다. 20대 후반에 다녀와서 30대 초반이 다 지나는 동안 끌어안고 다닌 이 일기 더미도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내가 책을 쓸 자격이 있을까”


나에겐 역류성 염증이 있다. 식도 끝 명치에, 미간에, 뒷덜미에, 열다섯 살 겨울에, 스물여덟 살 이집트에, 내 몸과 기억 어느 토막 끄트머리에 염증이 매달려있다가 편안하고 재치 있는 작업을 만나면 덜컥 역류하는 통증을 앓는다. ‘저기에 비하면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로 시작하는 모자람이 내 삶 전반에 가지처럼 쭉쭉 뻗어있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쉬워 보였을 그림일기를 묶는 일이 (그림만 묶어서 엽서집을 내면 되잖아, 아트북을 내면 되잖아, 글만 그림 아래에 한 줄씩 쓰면 되잖아,) 나에겐 이 모자람, 자격이라는 다른 말의 모자람, 과거에 그랬다는 건지 미래에도 계속 그럴 거라는 건지 모를 막연한 모자람을 넘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주아주 오래 걸렸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모자람 덕분에 지난 5년간 나는 ‘책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았다. 정말로.


여행을 끝내고 더욱 채워 넣은 나의 아프리카 그림일기 몇 권을 앞에 놓고, 나는 이 보물을 세상에 내 보이기 위해서 매일 다짐했다. 여러분, 이것 보세요. 저의 삶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안쓰럽기만 하던 저의 삶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8개월의 기록으로 33년을 해석하려고 할 때마다 내 모자람이 역류해서 속이 쓰려 주저앉았지만, 다시 일어설 때마다 방향을 틀어서 자조의 노선도 차츰 자기 긍정으로 좌회전했다.

그렇게 ‘책을 쓸 자격’을 찾아서 서른셋까지 왔다. 이제 보니 스물여덟은 세상 물정 모르게 너무 어려 보이고 서른셋이 책을 쓰기에 더 적당한 나이 같다. 나의 아프리카 기록을 박박 긁어모은 초고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고쳤기 때문에 더 이상 ‘이걸 남이 왜 읽어줘야 할까’ 싶은 메모장 일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사고방식도 이젠 ‘기승전-열심히 살았다!’라는 포장을 하려고 할 때 가동을 멈추고 ‘솔직한 말을 풀어내야지’ 한다. 그렇게 훈련을 했다. 그래서 이제 연민이나 가족 얘기 말고도 보고 느끼고 상상한 것을 글로 쓰고 한 줄에 꿰어봤으니 난 ‘책을 쓸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남이 부러울 때 속이 쓰리지만.


아프리카에서 그려온 이 그림들은 나 역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 필통 속 색연필 개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매일 쏟아지는 경험은 분에 넘치는 양이라 그 일을 맞이하고 기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유성 색연필 한 통을 들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나봤으니 같은 재료와 풍경으로 닮은 그림은 분명 없을 것이다. 대신 가슴 벅찬 하루를 살아낸 그림은 삶의 찬미를 노래하는 가수의 얼굴, 시인의 얼굴, 나의 부모님과 친구들의 얼굴을 더 닮았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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