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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07. 2024

시부야역. 버스기사

보다


친구들이 묵는 호텔 근처에 유명한 가츠산도 식당이 있다고 해서 함께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먼저 호텔을 가기 위해 전철을 타고 시부야역에서 내려와 저상버스에 올라탔다. 한 단 높은 곳에 앉은 기사님이 꾸벅 인사를 해준다. 동전을 세서 요금통에 넣고 마주 보는 노약자석을 지나서 뒤쪽 의자에 앉았다. 이번엔 빛바랜 푸른색 벨벳 의자. 왠지 포근해 보여. 버스가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으로 까칠까칠한 낡은 벨벳을 쓰다듬었다.


정류장에 있을 때 버스가 부드럽게 노선을 좁히며 인도로 다가왔듯이, 출발도 부드럽게, 신호등 정차도 부드럽게, 다음 정류장에 정차도 부드럽게 멈추어 선다. 도쿄의 널찍한 대로를 미끄러지듯이 굴러간다.

빌딩이 번쩍이는 대로와 공원 옆 숲길을 들락거리는 이 노선이 꼭 드라이브 나온 것 같구나. 이 길을 매일 다니는 기사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1. 이끄는 일

도쿄의 버스 기사란 도쿄의 구석구석을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다. 길은 유리 너머로 보기만 할 뿐 걷지 않으니까. 여행자가 이 버스로 도쿄 드라이브를 한다 해도 기사는 다르다. 승객의 목적지는 시간이나 만남이겠지만 기사의 목적지는 종점이다. 기사에게 버스는 과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 내렸던 직장의 사장님, 팀장님들이 생각난다. 나는 우릴 한 팀으로 여기는 와중에 버스에 탄 사람은 나를 버스 기사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데서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차 벨이 울릴 때마다 찌릿하진 않으셨을지.


2. 보는 일

안전운전으로 유명한 일본에서 버스는 더욱 천천히 움직인다. 시간보다는 안전이 우선인 게 확실하다. 정지선이 보이면 한참 전부터 속도를 줄이고, 승객이 올라타면 반드시 앉고 나서야 출발한다.

도쿄 시내 4개의 차선을 무사히 넘나들려면 버스 기사는 앞만 봐야 한다. 앞은 유리창으로 보고, 옆은 앞에 달린 거울로, 뒤도 앞과 옆에 달린 거울로 비춰보는 거지 뒤가 궁금하다고 절대 뒤를 쳐다봐선 안 된다.

안전을 다짐하는 것은 위험을 미리 보는 일이다. 사이드미러로 사고를 생생하게 상상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멈춰있을 때, 나아가기 시작할 때, 속도에 올라탔을 때 어떤 상태에서든 내가 늘 길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시간에 쫓길 때, 같은 목적지로 가는 경쟁자가 많을 때는 조여 오는 길을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내게 가까이 붙는 이를 주시하며 거리를 두어야 하고 버스에서 보내는 신호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거리의 이름과 신호로 방향을 읽으며 정류장에 가까이 간다. 버스 기사 얼굴에 여유와 긴장이 수시로 스친다. 팀원에겐 늘 전망에 대해 얘기해 주면서 혼자서는 큰 핸들을 꽉 움켜잡고 그 시간을 버티셨던 건 아닐까.


승객이 앞문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버스에 다시 아무도 남지 않은 때에도 버스 기사는 계속 앞을 보고 있었다. 속이 텅 빈 채로 밤길을 달려도 외형은 변함없었다. 번듯하고, 튼튼하고, 허물어지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막차를 이끌고 종점까지 갔다.


3. 한 몸이 된다

내가 팀원일 때, 누가 시키는 일을 받아할 때는 워라밸을 악착같이 지켜냈다. 워크 앤 라이프니까 워크는 삶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몇 년째 내 책을 만들며 살아보니까 이 일은 세상에서 나 혼자밖에 못하니까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일과 삶이 아니라, 일이 삶이고 삶이 일이 되어야 단 하나의 나로서 이 길을 굴러갈 수 있다. 내 일을 끝까지 몰고 갈 수 있다.


일렬의 좌석 배치표에서 가장 안쪽의 자리. 칸막이가 높이 가려주는 자리에서 골똘하게 차트를 보던 팀장님처럼. 나도 어느덧 내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눈, 고개, 손, 발과 발가락처럼 몸의 끝부분만을 움직여 나의 거대한 버스를 조종해 나가고 있다. 어느새 버스와 한 몸이 되는 버스 기사. 이끈다는 것은 그것과 한 몸이 되어 내 몸으로서 나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나를 데리고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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