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한다
1. 배낭
오후 3시. 조용한 일본 전철에서 사람들은 수다 떨지 않는다. (다리 꼬지 말라고까지 방송을 하니까) 여기는 오모테산도역을 지나는 긴자 선. 한국의 3호선 같은 주황색 벨벳 의자인데 열차 칸 폭이 한국보다 좁은가, 앞사람이 더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어른들 사이에 푹 파묻혀있던 초등학생 아이가 고개를 든다. 아이가 내리려고 끙차 일어날 때 작은 몸에 주렁주렁 걸어놓은 것들이 덜거덕거린다. 이 덜거덕을 덜컹덜컹 끼이익 박자에 맞춰가며 아이는 손잡이 없이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는다. 무거운 가죽 모자 아래로 질끈 묶은 삐뚤어진 양 갈래. 소매에 숨은 고사리손을 그려본다.
검은 막대 같던 아이의 잔상이 전철에 남아있다. 란도셀이라고 하는 아이의 몸통만 한 검정 가죽가방의 빈틈없이 단단한 모양이 SUV 타이어 같다. 일본 초등학교에는 사물함이 없어 학생들은 숙제할 교과서와 내일의 준비물을 매일 다 싸서 다닌다고 한다. 작은 몸집의 아이들은 한 뼘 큰 교복에 모자와 구두까지 갖춰 입고 흔들리는 전철에서 이 가방을 고쳐 매느라 쩔쩔맸다. 아니 나한테만 버거워 보이는 거지 아이들은 이미 익숙하다. 일어설 때, 기다릴 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등짐을 지다 나동그라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 일에 익숙하다.
2. 할 일
저 작은 아이한테 뭐 저렇게 할 일이 많을까? 학생은 공부가 일이라고 하는데 공부가 대체 뭐길래. 학문을 배운다는 건 차치하고, 교복 입은 초등학생의 일과를 아침부터 따라가 본다.
내 이름이 수 놓인 유니폼을 속부터 겉까지 차례대로 채우고 단단하게 묶는 일. 하루를 학교 시간표로 나누어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를 거쳐 가는 일. 책이든 책상이든 교실이든, 시간표 같은 사각형 안에서 내 자리를 지키는 일. 스케줄러 속 오늘 할 일을 하나하나 지워내면서 미래 내 ‘할’ 일에 대해 꿈도 꾸는 일.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이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 준비물로 묶어주면서 - 오늘내일이 자전거의 체인처럼 이어진다.
저 아이가 민소매 한 장 반바지 한 장 입었다면 놀이터에서 뛰고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뺑뺑 돌며 놀았을 텐데. 교복을 입혀놓으니, 아이의 하루가 굵은 직선으로 그려진다. 그 길 따라 오늘의 할 일을 해나가는.
3. 나와의 약속
나의 일과는 보통 새벽 4시 반부터 10시까지 일하고, 점심부터 밤까지는 내 작업을 한다. 해 떴을 때 작업시간을 확보하다 보니 일이 자꾸 새벽으로 밀려났다. 돈 버는 일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내 작업을 일이라고 해야 하나. 돈 못 버는 이 일은 일인가, 취미인가. 일은 일인데 수입은 없으니, 직업이라고는 못 하려나.
이런 생각을 떨치며 집을 나서 도서관이나 카페에 간다. 그러다 오후 햇살에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오면 “안돼! 마디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는 데 힘들어할 거야? 성과를 내야지. 정신 차려!” 다그치는 날의 연속이다.
그러나 옆 나라 초등학생을 보고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일이란 성적이나 수입이랑 상관없다. 그저 온 정신이 ‘해야 한다’에 매여있는 것이 일이다. 오늘 하던 걸 내일도 이어서 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 내 약속엔 오늘과 내일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니 무거운 게 당연하지.
4. 시간표
연봉 높은 조직에 들어가려고 12년에 몇 년을 더 돈 내고 공부하고서는, 이제는 그 조직에서 나오기 위해, 내 일에 직책이 아니라 이름을 새기기 위해 또 돈과 시간을 들여 무언가 배우는 이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새벽 4시 반에, 저녁 8시에, 주말 아침 7시에, 내 가방을 뒤적여 다시 나의 책상에 앉는다. 평일 9 to 6을 지우려는 듯이.
‘성과를 내야 하는데’ 속에서 괴로워하는 나의 동료에게 나지막이 말해주고 싶다. 어느 만큼 배워야 이룰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을 때는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볼까. 단순하게. 어차피 우리는 늘 배우는 사람이니까.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보자고. 수십 명이 법칙과 논리를 까맣게 암기하던 때가 있었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의 공부는 혼자서 손으로 느낌을 익히고, 눈을 감고도 생명력의 찰나를 향기로, 마찰음으로, 혀의 묵직함으로 기억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익숙한 방식. 시간표대로 살아보자. 나만의 시간표대로. 처음 등원이란 걸 할 때는 아침 9시 유치원에 입장했다가 돌아오는 것도 일과가 된다. 그렇게. 하루 30분, 보호자 없이 1시간, 한나절, 어느새 9교시를 견디는 체력까지. 졸아도 좋고 가끔 땡땡이를 쳐도 좋다. 그저 오늘 할 일을 내일도 이어서 하겠다는 꿈을 꾸자. 그러다가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을 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