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
내 직업은 개발자인지라 컴퓨터를 켜면 주로 코딩을 한다.
즐겁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는다. 코딩이 즐겁던 때도 있었지만 몇 년을 일하다 보니 흥미는 떨어졌고,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을 더 좋아한다. 이제는 철저히 일로만 코딩을 하는 셈이다. 그래도 프로라고 빈틈없이 일하려고 노력하긴 한다만, 흥미가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주말에는 쉬며 문학, 사회, 철학책을 읽고 개발과는 상관없는 글을 쓴다.
가끔은 주말 아침부터 눈을 떠서 일찍 카페에 나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북카페에 가면 사방에 책이 있다. 바로 뒤에 문학책들이 놓여있는 자리에 앉으면 숨통이 트인다. 비즈니스 논리와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세계에서 벗어난 기분이 든달까. 어디까지나 회사 잘 되라고 하던 일들에서 벗어나 개인의 문제를 탐구하고 소외된 곳을 비추는 문학을 접하면 후시딘이라도 바른 것처럼 마음이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문학은 회사에서 받은 상처들을 치유해 주는 연고 같다.
문학의 세계와 회사의 세계는 글을 쓰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 회사에서 쓰는 글은 읽는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주려 노력한다. 글을 읽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해서는 곤란하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이유를 가지고 일을 한다. 효율성과 경제 논리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지만, 매일을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힘이 든다. 글이란 메시지 전달 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렇게 해석의 여지없이 쓰기에는 아깝기도 하고 말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1984>에 나오는 신어가 떠오른다. <1984>의 빅브라더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언어의 개수를 줄이며 표현 방식을 제한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 언어를 제한하여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를 막아버리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언어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장면인데, 회사의 언어를 접하다 보면 종종 그 신어가 떠오르곤 한다. 뭐, 그것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언어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지도 않기에 답답한 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상한 영어 단어를 곧잘 가져와 쓰니 사용하는 단어 수가 늘어난다는 점은 빅브라더보다 나은 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거기에 개발자가 쓰는 단어는 상당히 건조하다. 대체로 기계의 작동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를 쓰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기계가 언제 인간 눈치를 보며 작동하던가, 기계는 그냥 정의해 놓은 에러를 내뱉고 죽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나마 인간미를 발휘하자면, 나 말고 다른 개발자를 위해 코드를 짜곤 한다. 나중에 원인 파악하기 쉽도록 에러메시지라도 상세히 내뱉고 죽도록 신경을 쓴다. 어떤 일을 하는 코드인지 상세히 적어놓고 읽기 쉽도록 정리하는 등 그 와중에도 인간미를 발휘할 수는 있다. 그래도 사용하는 말들은 회사의 언어보다 더 건조하고 정확하며 논리적이다.
정확한 의사소통에는 필요한 말들이지만, 나는 쉬는 날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사실은 그런 말들을 쓰는 현실에 어느 정도 진저리가 난다. 도망치고 싶고 되도록 멀어지고 싶다. 하루를 살더라도 정확한 말을 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나무 위의 까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고, 차 한 잔이 주는 향을 풍부하게 적어놓고 싶다. 오늘 날씨의 향기가 어땠는지를 느끼고 싶고 고양이의 표정을 살피고 싶다. 문학이 하는 말들에는 이 모든 것이 들어있다. 문학 안에서는 언어가 아름답고 힘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마치 회색 빛의 세상에서 색깔이 있는 세상을 보는 것처럼 회사에서 쓰는 언어와 문학이 쓰는 언어는 다르다.
한창 과학과 기술에 빠져있는 사람들 중에는 부정확한 문학의 언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는 메시지 자체에 치중하는 사람들은 '대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문학의 언어를 싫어할 수 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더 선호하는 언어가 있게 마련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책을 접하고 글을 쓰면서 언어의 해상도를 알아버렸다. 예술이라는 의미로서의 언어, 표현 수단으로써의 언어, 그래서 치유하는 힘, 설득하는 힘, 보여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깨닫고부터는 회사에 갇힌 언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개인보다는 효율성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조직에 더 많은 부유함이 모인다. 내가 개발자라는 답답함에 갇혀있는 건 순전히 그런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조금 더 많은 부를 추구하려는 비겁한 개인인지라 끝없이 기계와 대화하고 있다. 퇴근 후나 주말에야 좀 더 색깔 있는 언어를 찾아 글을 쓴다. 다만, 낮 내내 회사와 개발자의 언어를 사용하느라 나의 언어 실력도 제한되고 있는지 종종 내 글에서 문학성이 부족함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은퇴를 해야만 비로소 언어의 아름다움 속에 제대로 빠질 수 있을까. 지금은 문학에 발을 담그지도 못하고 손으로 조금 쓸어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다.
문학이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에 언어의 힘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기술로 밥 벌어먹고 있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언어가 주는 힘을 나는 믿고 싶다. 단순히 최첨단 기술의 길을 걸어가기만 하기보다는 오랫동안 가치를 지녀온 무언가를 돌아보고 싶다. 효율성과 자본주의적인 성공만을 외치는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돌아보고 사람의 가치를 찾아보는 문학은 가치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진정한 인간성이라고 믿는다.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 역시 그 인간성을 탐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기술을 탐구하는 열정과 미학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세상에는 기술이 있고 또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다. 그렇게 시야가 트여버린 이상 기술만 바라보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개발자로서의 열정이 식어버린 대신, 언어의 아름다움과 문학이 보여주는 사람의 소중함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문학이 끼얹어버린 어떤 영향력이 내 안에서 구체화된 것 같다. 나 나름대로 이공계 사람으로서 많은 갈등을 느꼈고 또 느끼고 있지만, 지금의 내 생각은 그렇다. 다양한 언어를 쓰고 싶어 졌고, 기술보다는 사람을 보고 싶어 졌고, 그러면서도 나란 사람은 기술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문학을 접하면서 회사 생활의 답답함은 더 심해졌고 내 안에서 기술과 인문학이 충돌하는 갈등을 언제나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긴 직장생활에서 느낀 매너리즘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다시 코딩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글쓰기와 독서에 빠져있고 싶다. 그게 좀 더 사람스럽게 사는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이제 문학에 살짝 들어선 수준이라도 문학을 접한 개발자는 끝없이 갈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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