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점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Apr 17. 2024

<서점일기> 세월호 10년, 며칠의 기억들

1.

남자 분은 혼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차분하게 책장을 넘기면서 낮맥. 부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이번에는 기네스 한 병 주세요”

그는 천천히 느리게 마셨다. 얼핏 보니 우치다 다쓰루의 책을 보고 있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오후. 그는 기네스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새 병을 시작할 때마다 곁들여낸 견과류와 맥주를 깔끔하게 비우셨다. 매번 빈 병과 잔을 직접 카운터로 가져다주시는 매너까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딱 세 병 드시고 마무리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청하셨는데, 책 세 권을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내 동공이 흔들렸다. #520번의 금요일, #봄을_마주하고_10년을_걸었다, #책임을_묻다. 세월호 10주기에 마음 포갠 책들이다. 제법 능숙하게 책의 바코드를 찍는데 어쩐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여러모로 감사하다고 한마디 인사를 드리는데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다행히 그리 티나지 않았다.


그저 우리들 마음이 다 비슷하다는 걸 발견할 때, 세상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기어이 세월호 기억식도 회피한 대통령이나 행안부 장관 같은 치들과 달리 시민은 늘 조용하게 다정하다.

마침 L쌤이 톡을 보냈다. 서울시청 앞에서 4시16분 세월호 기억식 갔다가 오티움 들리겠다고. 기억식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바람 결에 그 마음들을 달고 오시겠구나. 괜히 마음이 또 푸근해졌다. 먼 길 달려와 기억식 한 구석에 있을 분들과 연결된 느낌. 그걸로 족했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닌지 10년이다. 이젠 보라색 리본도 함께 있다. 아침에 불현듯 검은 셔츠에 검은 쟈켓을 챙겨입고 겨울 내내 신던 검은 구두도 다시 꺼냈다. 나만의 소소한 리추얼에는 기록도 있다. 페북이 4.16 마다 내가 올린 기록을 보여줘서.. 퇴근길 버스에서 노란 리본 사진을 찍었다. 지쳐 잠들기 전에 엄지로 주절주절..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되려고 몸부림 친다면.. 아마 별이 된 아이들 덕분도 있을게다. 다들 비슷할거라 생각하니 또 마음이 웅장해진다.


2.

두 권 팔았습니다. 오픈 4주 동안 더 많이 팔린 책들과 달리 #봄을_마주하고_10년을_걸었다, 선뜻 손대지 못하는 책이었나봐요.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 그 어린 피해자들에게 낙인 찍고 비난해온 우리가 담겨있는 책입니다. 끝내 품고 가신 분들에게 각별한 연대의 마음을 저도 품었어요.


#520번의_금요일, 한권도 못 팔았어요. 제가 부족한 탓. 세월호 참사에서 누군가를 잃어버린 가족들의 10년 이야기라니, 사실 저조차 펼쳐볼 엄두가 안나는지라.. 언젠가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님맘 제맘. 세월호 트라우마는 깊고 길었어요.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해서 어려워요. 저는 이태원참사에 대한 책 #정부가없다 쓰면서, 참사를 제대로 바라보는게 어떤 의미인지 뒤늦게 배웠죠. 10년 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뉴스 다 챙겨보며 날마다 우는 것으로 연대를 대신했는데요.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무력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마주하는게 연대의 첫걸음이 되기도 합니다.


초초보 서점언니, 저 두권으로 시작해 세월호참사 10주기 책 네권을 서점 입구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았어요.


”세월호참사 10년, 우리는 책임을 물었고 국가는 책임을 묻었다“는 #책임을_묻다. 세월호참사로 숨진 학생들의 부모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변호사 분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고, 정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찬찬히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두둥. #세월호_다시_쓴_그날의_기록. 10년 동안 흐려지고 뭉개진 팩트들을 쫓아 최선을 다한 기록입니다. 방대한 재판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의 퍼즐을 맞춘 작업에 고맙습니다. 잠수함 충돌설을 검증 끝에 기각하고, 실제 해경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세밀하게 돌아보고, 침몰 후 구조대응이 무너진 과정도 추적했어요.


우리가 바라는 건 이같은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거죠. 세월호 참사로 처벌받은 건 해경 정장 단 1명 뿐이었어요. 수사만으로 해결되는건 없어요. 더 중요한 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밀하게 제대로 돌아보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10주기 기록들이 그래서 참 귀합니다. 머리 숙여 감사. #종로북살롱 #오티움 오실 때 함 봐주세요.


3.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뜻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이 따뜻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지 마

아빠, 새벽 세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 마

아빠, 내가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2014년 4월16일 세월호에서 희생된 유예은 학생의 생일에, 진은영 시인이 대신 전한 말. #오티움 들여놓은 첫 시집입니다.


오늘 오후 3시,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이 열린답니다. 마음이라도 함께 합니다.

서울에서는 시청역 3번 출구,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오후 4시16분…

매거진의 이전글 청계2가 북살롱 오티움, 마침내? 커밍 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