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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Oct 17. 2024

요리무협 시대에 셰프님 책들. 박찬일, 보데인, 김서령

요리 무협에 푹 빠졌다. 패기만만한 신진 고수가 현란한 능력의 재야 고수, 각 문파의 장문인 급 고수들이 저마다 절세 신공을 겨루는데 그게 요리라니. 밥상과 먹방에 진심인 인간으로서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비무를 지켜보며 희로애락을 느꼈다. 하다못해 두부 하나로 수십 가지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들은 ‘무한 요리 지옥’조차 열정으로 이겨내는 이들이다. 내친김에 셰프들의 책을 펼쳤다.  



(편집 예쁜 버전으로 보시려면 슬로우뉴스. 브런치에는 본진 업데이트 해둔다)


1. 음식에 스며든 추억: [밥 먹다가, 울컥]

일단 셰프 중에 단연 글쟁이 대표선수 박찬일 님의 [밥 먹다가, 울컥]. 오래된 추억에 음식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시사인’ 연재 당시에도 종종 울컥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하루 열 몇 시간을 일하고, 질리도록 송아지고기만 먹다가 친구가 보내준 고추장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로 밥 비벼 먹다가 눈물 흘린 이야기. 그 친구의 사연으로 구구절절 이어지는데 박 셰프님 이야기를 듣다 보면 1000일 밤이 부족할 지경이다.


셰프도 노동자

노동자로서 셰프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요리사들의 위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 12시엔 위가 음식을 거부한다. 그 시간엔 남들 밥상을 차리다가 박 셰프님 경우, 오후 3시와 밤 10시 두 끼로 버틴다. 늦은 밤까지 하는 식당마다 모여드는 셰프들. 팔뚝 걷어붙이면 저마다 튀김 요리 상흔인 ‘기름빵’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종일 기름 연기에 버무려진 요리사는 머리를 감을 때 샴푸도 잘 안 듣는다. 양식당에선 그릴, 한식당에선 불판이라 부르며 숯을 쓰면 퇴근 무렵 옷깃은 시커메지고, 코를 풀어도 시커멓다. 그 기름증기가 폐에 치명적인데 2022년 겨우 첫 산재 판정이 나왔다. 대한민국에는 영세 식당만 12만 개, 안전하게 보호받는 경우는 드물다.


셰프들은 평소에 뭐 먹지?

아무리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셰프라 해도, 그건 손님용 메뉴. 셰프들은 급식 먹거나 맨날 같은 음식이다. 피자집 셰프는 피자만 먹다가 질린다. 아니면 ‘기레빠시’. 일본어인데 남은 자투리 재료로 후다닥 만드는 메뉴다. 양식뿐 아니라 한식, 중식집도 ‘스파게티 알라 기레빠시(Spaghetti Alla Kirepassi)가 일상 메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소스, 마요네즈 케첩 멸치젓 간장 쯔유 고추장 춘장에 김치까지 활용해 배추와 감자 당근 마늘, 청경채 고수, 사과, 복숭아, 팔다 남은 삼겹살, 햄과 소시지, 상태 별로인 닭튀김, 모두 파스타 재료다. 근데 사실 주부들이야말로 ‘냉털(냉장고 털이) 고수’ 아니던가. 남은 걸로 뭐 만드는 선수들인 주부야말로 모두 셰프지.


음식마다 사연 구만리

박 셰프의 음식 탐험은 사연이 구만리쯤 이어진다. 최고의 미식 재료로 꼽히지만 수백 마리 까봐야 500g 한 통 채우기 힘든 성게. 성게 다듬기는 그녀들의 허리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이제 최하가 예순 줄이라는 해녀들은 추운 바다에서 나와 탈진한 채로 장작을 피우고 미역 국수를 끓인다.

깔때기 국수라고, 깔깔할 때 끓여 먹거나 혹은 입에 깔때기처럼 연료로 밀어 넣는 국수다. 세상 맛 없다고. 열량과 에너지와 염분으로 만든 해녀들의 전투식량이다. 어르신들의 어느 노포는 차가운 술을 팔지 않는단다. 속에 탈 나면 안 되니까 미지근한 막걸리를 소금 안주에 마시는 게, 인생 마지막 시기의 술이라니.

그저 음식 에세이? 정도로 보면 소개하는 내 탓이다. 평범한 음식, 있을 법한 추억 하나를 엮어내고 풀어내는 박 셰프님 글발이 핵심이다. 어느 에피소드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게 울고 웃긴다. 강추.


2. 주방 현장을 고발하다: [키친 컨피덴셜]


셰프의 책으로는 [키친 컨피덴셜]을 빼놓을 수 없다. 미안. 절판이다. 그래도 관심 있으면 도서관으로. ㅎ

한 요리사가 키친 현장에 대한 내부 고발을 취중 진담 마냥 써서 뉴요커에게 보내버렸다. 1999년 ‘이것을 읽기 전엔 아무것도 먹지 마세요’(Don’t Eat Before Reading This). 난리가 났다. 당시 주급 850달러의 이 셰프에게 출판사는 책 내자고 5만 달러를 제안했다. 이 책은 44주간 NYT 베스트셀러였고, 22개 국어로 번역됐어. 미친 컨피덴셜. 식당의 비밀을 폭로했다.

앤서니 보데인(Bourdain. 국내에 번역될 때는 보댕으로 소개됐지만, 그의 삶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 ‘로드 러너’를 보니 미국 친구들은 다 ‘보데인’이라고 발음한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셰프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지난 2016년 베트남 대중식당에서 쌀국수를 먹던 사진도 낯설지 않다.


"나는 르베르나댕(생선을 원산지에서 직접 사오는 것으로 알려진 별 네개 짜리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는 한, 월요일에는 절대 생선 요리 시키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의 월요일 해산물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잘 안다. 그것들은 대략 4, 5일 된 것들이다! 졸음이 오는 월요일 저녁 트리베카의 그렇게 나쁘지 않은 별 두 개짜리 식당에 들어가면 노란 참치, 기름에 볶아 끓인 회향 열매, 절인 토마토, 샤프론 소스로 만든,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특선 메뉴를 보게 된다. 당연히 먹고 싶지 않겠는가 메뉴부터 볼 때 우리는 확 띄는 두 단어는 바로 이것이다 월요일 그리고 특선 요리.일요일의 해산물은 어떨까? 글쎄 가끔 먹는 거라면 뭐 괜찮겠지 그러나 비네그레트 소스를 곁들인 해산물 샐러드나 해물 프리타타처럼 오래된 재료를 처분하려는 의도가 명백히 보이는 음식은 절대 브런치 메뉴로 선택할 게 못 된다. 브런치 메뉴들은 비용에 민감한 주방장들이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쓰고 남은 재료들과 정상적인 음식들을 모양에 맞게 썰고 남는 부스러기들을 처분하는 하치장이다. 살짝 구워서 레몬 한 조각 곁들여내면 훨씬 좋을 생선이 졸지에 비네그레트 소스를 잔뜩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걸 본다면 메뉴에 “비네그레트 소스로 버무린’이란 것은 오래된 이거나 위장된 이란 뜻을 다름 아니다."


그가 드러낸 키친 컨피덴셜은 90년대 뉴욕의 잘나가던 식당 주방이 얼마나 마초적인지, 거친 해적들처럼 난리를 쳤는지도 생생하다. 군대를 가보지 않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주방은 딱 군대처럼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게 막 결혼한 신부가 피로연 하러 온 식당의 셰프와 건물 밖 정사를 나누는 걸 보고 충격받은 덕분이라고. 아무튼 좀 불편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게 그 시절이겠지.


그는 여성을 존중하지만 “일부러 더 멍청이처럼 구는 지옥의 라커 룸 한 구석에서는 참고 견뎌야 할 일들이 많으며 그런 남성 호르몬이 넘치는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여성들은 너무도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후, 뉴욕 레스토랑 주방들이 많이 바뀌었단다. 고마운 일이다. 무엇보다 그는 글을 정말 잘 썼다. 이야기도 그 매력적이지만 이 사람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미식가 부모를 따라다니며 일찌감치 맛을 배운 건 아니고, 원래 다른 꼬마처럼 햄버거나 즐겼다. 다만 그는 ‘금기’를 깨는 도전, 저항에 더 꽂혔다. 어린이가 굴 맛을 아냐? 그런 탐험이 짜릿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달콤했던 그 순간, 그 순간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 봤던 다른 수만은 최초의 경험들, 최초의 여자, 최초의 마리화나, 고등학교에 첫날, 첫 번째 출판된 책, 기타 등등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 난 명예를 얻었다.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는 번쩍거리고 아직도 살아 있고 어딘가 성기처럼 생긴 그 물건에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이고 생 줄 아저씨가 가르쳐준 대로 껍질을 입에 대고 기울인 다음 한입에, 후루룩 소리를 내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거기선 바닷물 막과 굴 맛 그리고 웬일이지 미래의 맛이 났다.


드라마 같은 인생

휴양지 접시닦이 알바하다가 요리사의 마초적 아우라에 반해 대학을 중퇴, 요리학교 CIA에 들어갔고, 마약쟁이였고, 망한 셰프였다가 어느 날 헤로인을 끊었고, 한동안 성실한 셰프로 살다가 저 글로 떴다. 해학적 독설가로 변신했고, 방송인으로 세계 요리를 소개했다. CNN의 간판스타였고, 한 해 250일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지구 26바퀴를 돌았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던 셰프였고 그는 어느새 요리뿐 아니라 세계의 약자들까지 만나고 다녔다.

이 얘기는? 책이 아니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드러너, 앤서니 보데인에 대해]를 봐야 그의 매력이 또다시 보인다. 그의 사생활도.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알 수 없지만) 세 번째 여자는 이탈리아 여배우이자 감독인 아시아 아르젠토였다. 다큐를 보면 들뜬 소년처럼 행복한 연애에 빠진 중년 남자가 나온다.


아르젠토는 21살에 칸영화제에서 하비 와인스틴에게 성폭행당한 이야기를 21년 만에 칸영화제에서 ‘미투’ 폭로했고, 보데인은 이 문제에 있어 아르젠토의 든든한 전우였다.

다만 그 이후, 늙은 남자의 젊은 연인은 타블로이드에 다른 남자와 함께 한 사진이 실렸고… 보데인은 그 무렵 프랑스에 방송 촬영갔다가 자살했다. 진실은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잘나가던 남자가 62세에 극단적 선택을 하다니. 음식에, 셰프의 세계에, 요리에, 방송에, 사람에 몰입하고, ‘영혼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달려가던 그는 그렇게 멈췄다.  


3. 조선 엄마 레시피: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음식 책 얘기하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을 빼놓을 수 없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책. 부제는 ‘김서령이 남긴 조선 엄마의 레시피’.


글이 맑고 단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마음이 어떻게 전하는 것인지. 펄펄 살아 날뛰며, 그가 눈으로 본 이미지를 순식간에 이식해 주는 글이란 무엇인지,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더라? 싶은 글이다. “맑고 슴슴하고 수수하고 의젓하고 살뜰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국수)을 꿀꺽 삼키는 것”에 환호하는 저자를 따라 팔랑팔랑 마음이 부푼다.


“긴 시간 땅 기운을 빨아들였기에 품은 기운이 야물었던 늙은 호박”, “꽃향기가 코로 맡는 종류라면 냉이 향은 피부로 맡은 종류…땅의 정기를 물질화한 것이 바로 냉이다. 냉이의 향은 대지의 비밀스러운 뜻이고 본질”이라고. 책 읽을 때 그냥 바로 냉이 다듬고 나물 무쳤다.


배추적은 깊은 맛.혀에서만 단, 달게 먹고 난 후에 조금 민망해지는, 어쩌면 살짝 ‘죄’의 냄새가 깃든! 식욕이되 성욕과도 흡사하게 허망하고 말초적인” 얕은맛과 달리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 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라고.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생 속의 반대말은 썩은 속이었다. 속이 썩어야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 배추적이었다”고. 사람 얘기다. 역시. 속이 썩은 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어려운데, 읽다 보면 몰입하는 생이 아름답고, 순간이 반짝반짝 빛난다.


시어른 돌아가셨을 때 고모 나이 77 세셨다. 스무 살 새댁이 비린 것, 누린 것, 익힌 나물, 생나물을 도토리깍정이 같은 그릇에 일일이 뚜껑 씌워 칠첩반상 격식 갖춰지어 바치는 동안 세월은 거짓말처럼 흘러가 버렸고 고모는 영정 앞에 엎드려 비로소 몹시 우셨다. 아이가 죽었을 때도 남편이 사라졌을 때도 경황이 없어 울지 못했던 울음을 비로소 마음껏 우셨다. “야야 살아보니 인생이 참 허쁘다.“


그녀의 고향은 안동. 유교의 예가 모두의 삶은 물론, 공기에 깊게 깔려 있다. 남편 잃은 스무 살 새댁이 57년간 시어른들 뒷바라지를, 삼시세끼 칠첩반상 차려내는 평생을 보내는 게 상상이 되냐고. 근데, 그 정직하고 고귀한 생애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어…. 인생 참 허쁘다, 그런 거지. 허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그냥 느낌만 알듯 모를 듯하고. 

그녀의 글을 따라, 그 레시피를 따라 달려보면 황홀하다.


“무를 나박나박 썰어 살짝 쪄내고, 간장과 파, 마늘과 깨소금과 고운 고춧가루를 넣어 가볍게 무친 후에 참기름 한 방울” 심심하고 덤덤해서 양반 음식 중에 상양반 음식이라는 설명. 가난과 짝을 이룬 꼿꼿한 자부와 자존심이 담겼다는데… 어휴,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인간의 마음을 열리게 한다’는 저자의 말이 남는다. 스스로 몸과 마음의 예를 다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그 맛과 멋을 추구한 이들의 삶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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