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극우 집회에 미국 성조기와 더불어 왜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는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에 호감을 느끼기 어려운 시절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이 미국 대선에서도 첨예한 주제가 될 만큼 이스라엘은 선을 넘었다. 특정 종족을 말살하는 제노사이드가 수십 년간 이스라엘 손으로 이뤄지고 있다. 올해 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을 말살하려 한다”며 이스라엘을 제노사이드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작년 10월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후, 9월 초 기준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4만 명. 부상자가 9만 명이 넘고, 실종처리된 이도 1만 명에 달한다. 숫자로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이스라엘 사망자는 1400명이다. 하마스도 나빴는데 이스라엘은 사악한 수준이랄까. 이스라엘은 최근 레바논까지 전선을 확대해 ‘삐삐 테러’를 통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일상에서 쓰는 전자기기가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한다.
(편집 예쁜 버전으로 보시려면 슬로우뉴스. 브런치에는 본진 업데이트 해둔다)
제노사이드라는 개념 자체가 60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당한 홀로코스트에서 출발했는데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신했다. 제노사이드를 다룬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유튜브 방송에서 소개하다가 거꾸로 꽂혀서 유대인들의 현재 만행을 쫓은 책을 찾았다. 유대인 역사학자 일란 파페(Ilan Pappe)의 통렬한 비판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다.
파페는 “이 책은 균형 잡힌 책이 아니다”라고 서문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서 식민지화되고, 점령당하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신해 권력의 균형을 잡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라고 했다. 균형과 중립의 이슈가 아니라 팩트를 봐야 한다.
과거 유대인 법률가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국가가 시킨 짓’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나치 전범들을 ‘인도에 반하는 죄’로 단죄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동안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처벌은커녕 비판도 받고 있지 않다.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에 대한 거짓 신화가 우리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고,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행위는 재앙을 가져왔다. 학살을 정당화하는 거짓 신화를 조목조목 따지는 이유다.
그럴 리가. 유대인 정착민들이 원래 그곳에 살던 원주민을 쫓아냈다. 시온주의 운동에 의한 식민지 점령이었다.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1878년 기준 팔레스타인 주민 87%가 이슬람교도였다. 유대인 인구는 3%도 안 됐다. 19세기 팔레스타인은 근대화와 민족 국가화 과정이 진행 중인 비옥한 땅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외교부 공식 웹사이트에는 정착 당시 그 땅에 1000가구의 유대인이 거주했다는 설명밖에 없다. 비어 있는 척박한 황무지를 개척한 것처럼 보인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된 시온주의(Zionism)는 고대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사실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었던 것은 유럽이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유럽에서 모두 떠나버리기를 원했다.
저자는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을 인용해 기독교 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대인을 언젠가 성지로 돌아가야 하는 ‘민족’으로 몰아갔다고 밝혔다. 시온주의 뿌리가 반유대주의인 셈이다. 당대 식민지 패권국가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이용한 전략적 이익부터 챙겼다. 죽은 자의 부활과 메시아의 재림과 더불어 세상의 끝을 계획한 신의 뜻이라는 해석이 동원됐다. 정작 20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유대인은 2000년 전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후손이 아니라, 8세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튀르크 국가 하자르 후손이라는 연구도 있어 논쟁 중이다.
존경하던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로부터 시오니즘에 대한 지지 요청을 받자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옹호한 마하트마 간디의 성명이 인상적이다. 아무리 존경하는 사이라 해도, 할 말 하는 간디였다.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영국이 영국인의 소유이고, 프랑스가 프랑스인의 소유인 것처럼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소유입니다. 아랍인에게 유대인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비인간적인 짓입니다…팔레스타인 일부 또는 전체를 유대인이 되찾기 위해 자긍심 넘치는 아랍인의 수를 줄인다면 인류에 대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간디, 1938년
최초의 시온주의 정착민이 도착한 1882년, 그 땅은 비어있지 않았다. 초기 대표단은 “신부는 아름답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보고했다. 시온주의는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를 식민지로 만든 것과 유사한 정착형 식민운동에 나섰다. 문명을 말살하고,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보호구역에 가두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서구 열강들이 이스라엘에 관대한 것은 저마다 가해자 역사를 뭉갠 탓일지도 모른다. 열등한 원주민들은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이스라엘 공식 서사나 건국 신화는 역사 왜곡에 도가 튼 수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나치 마냥 유대인을 증오해 저항했다고 했지만 초창기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거처를 제공하고 농사를 가르치는 등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유대 정착민들의 목적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그 사실이 분명해지고 난 이후 시작됐다.
그것은 종족 청소였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전 75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이미 추방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이 자발적으로 떠났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마을을 소탕하는 방식은 일관됐다. 여성 강간은 물론 시체 훼손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한 줄로 벽에 세워놓고 재미 삼아 총을 난사했다.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군인이 유대인 아이들에게 재미로 총격을 가한 이야기가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나오는데, 그 피해자들이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가해자로서 같은 짓을 했다.
“이스라엘은 7개월 만에 531개 마을을 파괴했고, 11개 도시 지역을 소개했다. 대규모 추방을 실시할 때에는 학살과 강간이 수반됐고, 10세 이상의 남성들을 노동수용소에서 1년 이상 감금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행동은 명백히 비인도적 전쟁범죄. 저자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발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이며, 이스라엘에게 도덕적 책임뿐 아니라 법적 책임도 있다’는 정치적 함의, ‘비인간적 범죄에 비록 법적 소멸 시효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아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범죄’라는 법적 함의, ‘유대 국가가 죄악에서 탄생 했으며 그 죄,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함의를 거론했다.
이스라엘 정치 엘리트들은 이 모든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1948년 사건에서 매우 다른 교훈을 얻었다. 국가가 인구의 절반을 추방하고 마을을 파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엔은 1948년 팔레스타인의 귀환을 결의했다. 이스라엘은 무시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통치를 ‘계몽적 점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던 논리와 닮았다. 모든 반대 증거는 묵살했다. 이스라엘이 선한 의도로 자비롭게 점령하려고 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폭력 때문에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역사를 조작했다.
토지를 몰수하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기 어려운 고립된 구역에 가뒀다. 유대인 정착촌은 기존 마을과 마을을 갈라놓았고, 수원지를 메마르게 하는 등 지역 파괴를 일삼았다. 하루아침에 살던 집의 모든 문과 창문을 시멘트, 회반죽, 돌로 막아버리는 주택 봉쇄 정책,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수확물을 파괴하고, 집과 차량에 무작위로 총격을 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국제앰네스티의 2015년 보고서다.
“이스라엘군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에서 어린이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살해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 군사 점령과 수백 명을 행정 구금한 것에 항의하거나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수천 명을 감금했다. 처벌받지 않는 고문과 기타 학대 행위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팔레스타인인과 그들의 재산을 공격하고, 사실상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1967년 이후 1만 5천 명이 ‘불법’으로 살해당했고, 이 중 2천 명이 어린이였다. 가자는 거대한 감옥이다. 물과 전기, 인프라를 이스라엘이 통제한다. 50년간 가자 사람들은 억류자, 인질, 혹은 죄수로 살아야했다
알 나자르 병원에 치료받는 아버지, 숨진 아이, 임시로 안치된 시신들.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폭격으로 지난 10월 7일 이후 1만8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고, 아직 수천 명이 잔해 속에 남아 있다. UN OCHA(인도주의 업무 조정국)에 따르면 가자지구 인구의 90% 이상이 다시 난민이 되어 떠났다. 이들 대부분은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이었다.
그 동네도 정치가 문제다. 나름 평화를 위해 1993년 ‘오슬로 협정’에 합의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지도자가 노벨평화상까지 받던 시절은 아련하다. 저자는 오슬로 협정 자체도 왜곡된 신화로, 비현실적이었다고 지적하지만 이후는 더 나빴다. 2004년 야세르 아라파트 사망 이후 정치 공백이 생겼다. 하마스는 테러리스트 조직이라기보다 이후 선거로 선출된 합법적 집단이다.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점진적 대량 학살’에 맞서면서 표를 얻었다.
그새 이스라엘에서도 극우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다. 의회 지도자는 TV에 나와 4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모든 구성원을 암살하거나 추방해야 한다고 키득거렸다. 종족 청소가 분쟁 해결 최선의 방안이라는 주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목받았다.
저자는 ‘두 국가 해법’에 관해서도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려는 이스라엘 발명품이라고 일갈했다. 서안 일부를 자치 지역, 준 국가로 만드는 대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귀환이나 이스라엘 내에서 평등한 권리, 정상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 실체다.
저자는 이 모든 부당한 현실을 지탱하는 신화에 반박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평화와 화해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역사 왜곡에 따른 오해는 큰 걸림돌이다. 비인간적이고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태를 용인하지 않으려면 일단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거짓 주장으로 명분을 찾는 권력은 언제 어디에나 꼭 있기 마련이라, 자칫 휘둘리면 참사로 이어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가 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나치 같은 악마, 무도한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서사 뒤에 숨었다. 정착 과정에서 4번의 중동전쟁에 승리한 이스라엘은 실제 전력뿐 아니라 내러티브 조작 능력도 압도적이었다. 9.11 이후 무슬림을 전형적 악당으로 만든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해 서구는 무심하거나 잔인하거나, 각자 이익에 따라 편한 서사를 택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 해도 약자에 대한 말살을 정당화하는 하지 않을 만큼 인류는 진보했다고 믿고 싶다. 국제 사회가 대체로 무심하다고 해도 종족 말살, 점진적 대량 학살을 외면하는 대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우리는 일제가 ‘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사람들을 유린한 시절을 근대화로 미화하는 이들을 목격하고 있다.
식민지를 수탈하거나, 종족 말살을 시도하거나, 가해자는 언제나 역사부터 덧칠했다는 것을 명심하자. 자기들의 명분을 미화하고 상대를 무지렁이 혹은 악마로 만드는 것도 전형적 수법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태에, 저기 또 시끄럽네, 쟤네 또 싸우네, 정도의 무심함 대신 무엇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읽었다. 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