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던 딸이 팔짝팔짝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의 함성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으며 딸 옆에서 노래를 따라불렀다. 앞에서 초록색 광선검을 휘두르며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던 딸이 잠시 나를 돌아보는데 딸 뺨에도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슬쩍 웃음을 나누며 함성인지, 노래인지 신나게 목청껏 외쳤다. 나는 전광판 가사를 열심히 노려봤고, 딸은 모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내 옆과 뒤, 사방에서 젊은 여자들의 힘찬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촛불행동 쪽 실무자로 여학생들이 많이 참여했고, 집회 희망곡도 추천받았다고 했다. 90년대 생들의 플레이리스트나 다름 없다고 했다. 오늘의 승리는 너희들이 만들었구나. 딸이 선언했다.
"엄마, 우리는 계엄세대야."
몇년 만에 꺼낸 털부츠의 바닥 고무가 삭은 걸 발견한 건 버스에 타고 나서다. 오후 1시 대방역부터 내 걸음마다 검은 고무 조각이 헨젤과 그레텔 과자 부스러기마냥 떨어지더니 샛강역 지나 양쪽 밑창이 다 떨어져나갔다. 얇은 내피 바닥을 통해 아스팔트의 냉기가 느껴졌다. IFC몰 가서 신발부터 사려고 하다가 집에서 이제 출발한다는 딸에게 SOS. 내 트래킹화를 챙겨 나온 딸은 3시 넘어 도착했더니 여의도공원부터 움직이기 어렵다고 했다. 집회를 적극 즐기는 친구 덕분에 앞쪽 좋은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딸과 도킹하러 인파 속으로 움직였다. 간신히 딸과 만나 친구들 자리로 돌아가던 중에 탄핵 가결. 솔직히 예상했었지만 훨씬 더 큰 감동에 휩쓸린 건 함께 한 시민들의 환호 덕분이다. 시민혁명 축제였다. 딸과 둘이 노래하며 울고 웃은 순간은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친구들과 다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소리질렀다. 흥부자 선수는 어디에나 있는 법.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표정은 자부심을 숨기지 못했고, 기쁨을 어떻게 더 격렬하게 표현할지 서로 경쟁하듯 흥을 냈다. 우리는 승리에 감격할 자격이 충분한 시민들이었다. 200만이 몰려왔어도 안전하다는 감각이 충만했다. 느리게 움직여도, 답답하게 갇혀도 서로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배려심이 넘쳤다.
죽은 자가 산자를 구했구나. 한강 작가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태원에서 희생된 청년들이 우리를 한번 더 키웠다. 5.18 희생자들이 계엄에 맞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각인시켰고, 세월호 희생자들이 정부란 무엇인지, 언론은 무엇을 하는지 시민들을 일깨웠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평생 갚으며 살 수 밖에.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는데 1시간 넘게 걸렸다. 걷다 서다 반복했다. 마포대교 북단 횡단보도에서 주행하는 차들과 번갈아 움직이느라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걸었다. '질서 있는 퇴진'이었다. 차가운 강바람은 빽빽한 군중들의 온기로 참았다. 휘영청 보름달이 시민들의 귀가 길을 보살펴주는 이 특별한 밤, 대한민국 운명은 우리가 또 바꿨구나.
ㅈㅂ집은 못갔지만 마포 어느 식당에 간신히 자리잡고 고기를 구웠다. 엄마의 선배가 말아준 소맥을 받아들고 딸은 곧바로 인스타 스토리를 올렸다. '인생 소맥'이라고. 너무 맛있다고, 엄마도 맛보겠냐고 했는데 참았다. 내가 이런 날, 술을 참는 인간이다.
12.14 탄핵절, 소소하게 기록 남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몫을 했고, '계엄 세대' 뒷줄에서 행복했다. 12.3 내란의 역적은 이제야 직무정지됐다. 일단 오늘은 편히 자겠다.